멘붕의 시대, 힐링 예능에 주목하는 이유

 

“깜짝! 멘붕이야!” 소녀시대의 신곡 ‘I got a boy'에서 윤아가 부르는 대목에도 들어있듯이 이제 ‘멘붕’이란 말은 신조어에서 일상어가 되어가고 있다. 멘탈붕괴는 ‘정신이 무너질 정도로 충격을 받은 상태’를 뜻한다. 지극히 자극적인 단어지만 이만큼 작금의 사회가 주고 있는 충격의 강도를 잘 표현하는 것도 없다. 상상조차 힘든 사건과 사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무엇 하나 우리를 떡 하니 기대게 해주는 절대적인 가치가 부재한 시대, 우리는 이 불안함의 끝단에서 ‘멘붕’을 외친다.

 

'아빠 어디가'(사진출처:MBC)

웃음을 잃게 만드는 멘붕의 시대는 예능에서도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은 이른바 ‘힐링 예능’이다. 작년 <힐링캠프>가 ‘힐링’이라는 단어를 토크쇼의 제목으로 사용하면서 그 트렌드를 알린 이후 1년여가 지난 지금, 이른바 ‘힐링 예능’은 좀 더 본격화된 양상이다. 물론 <힐링캠프>라는 토크쇼 형식은 이미 <무릎팍도사> 같은 1인 게스트의 내밀한 속내를 파고드는 토크쇼에서부터 시도된 것이지만, 그래도 달랐던 것은 그 특유의 공기일 것이다. <힐링캠프>는 무언가 마음을 풀어놓고 허심탄회해질 수 있는 ‘힐링’의 느낌을 부여했다.

 

작년 말에 특집이자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기획된 <땡큐>는 <힐링캠프>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진짜 ‘힐링’에 더 접근한 프로그램이다. ‘스님, 배우 그리고 야구선수’라는 부제를 달았던 것처럼 이 프로그램에는 작년 한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로 힐링의 대명사가 된 혜민스님과, 컴패션 활동으로 나눔과 기부의 아이콘으로 자리한 차인표, 그리고 이제는 은퇴했지만 국민적인 영웅이었던 박찬호 선수가 한 자리에 출연했다. 이들은 강원도 오지로 들어가 잠시 ‘멈춰진 시간’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간의 마음이 하나로 엮어지는 경험을 전해줌으로써 ‘힐링’의 진면목이 바로 그 ‘함께 한다’는 것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작년에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기획되었다가 정규방송으로 정착한 <인간의 조건> 역시 ‘힐링 예능’의 정수를 보여준 바 있다. 휴대폰, 인터넷, TV가 없이 한 공간에서 일주일 간 생활하는 개그맨들의 일상을 덤덤하게 포착했다. 흥미로운 건 그 문명의 이기들이 사라지면서 그간 그저 지나치기 일쑤였던 그들의 관계 사이에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전화 한 통화를 애타게 기다리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애틋해졌다는 것. 문명이 편리함을 주는 대신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무덤덤하게 만들었다면, 이 프로그램은 그 문명을 빼놓음으로써 인간 본연의 조건을 찾아내는 ‘힐링’을 선사한다.

 

최근 방영해 호평을 받고 있는 <일밤>의 새 코너, <아빠 어디가> 역시 힐링 예능이다. <아빠 어디가>는 철부지 같은 아빠들이 평소에 같이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던 아이들과 함께 1박2일로 여행을 떠나서 추억을 만드는 그런 프로그램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가는 곳이 문명과는 떨어져 있는 시골이라는 것. 게다가 아빠들은 휴대폰도 반납하고 아이들 밥도 챙겨야 하고 잠자리도 보살펴야 하는 그런 미션들이 주어진다. 바로 이 ‘멈춰서는 과정’에서 이른바 힐링이 이뤄지게 되는 것. 집에서는 하지 못했던 아이 돌보기를 통해서 아이와 아빠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를 다시 재정립하게 되는 것도 힐링의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멘붕의 시대는 어쩌면 그 정신없이 빠른 속도로 변화해가는 세상에 휘둘리면서 정작 자신을 잃어가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작금의 ‘힐링 예능’들을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이들 프로그램들이 모두 지금의 속도와의 차단을 전제했다는 것은 바로 그것이 멘탈 붕괴된 정신을 ‘힐링’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강원도 오지로 떠나거나, 문명의 이기를 차단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 오롯이 교류하고 소통하는 인간의 체온을 복원하는 것. 바로 이 따뜻함이 ‘힐링 예능’에 대중들이 주목하는 이유일 것이다.

대중의 시대로 접어든 음악, 이제 주인은 대중이다

 

“방송사의 프로그램 인지도를 앞세워 음원시장을 잠식해 나가는 것은 대기업의 문어발식 경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국내 음원시장의 독과점을 발생시켜 제작자들의 의욕을 상실하게 하고 내수시장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으며 장르의 다양성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와 한류의 잠재적 성장 발전에도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크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사단법인 한국연예제작자협회(이하 연제협)가 최근 음원차트를 장악하고 있는 <무한도전> 음원에 대해 내놓은 성명이다. 언뜻 보면 그럴 듯한 논리다. 방송사가 프로그램을 활용해 음원을 내놓으면 그것이 기존 음반 제작자들이 내놓는 음원들과 비교해 압도적인 경쟁 우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제작자들의 의욕을 떨어뜨리고 내수시장을 교란하게 되며 또 방송 스토리텔링과 연관된 특정 장르의 음원들만 쏟아져 나와 다양성을 해치게 되고 결과적으로 한류의 성장에도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논리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이 논리가 정당하려면 지금껏 기획사들은 방송의 힘을 빌어 자신들의 음원을 홍보하거나 소속 가수들을 방송 프로그램에 내보내지 않고 순수하게 음악 활동만 해왔어야 한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다. 그들 역시 방송의 힘을 활용해 음원 수익을 극대화하려 노력해오지 않았나. 지금껏 우리네 음원시장이란 몇몇 기획사들과 방송사 간의 담합에 가까운 관계 속에서 그들만의 리그를 유지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국내 음원시장의 독과점은 이미 몇몇 대형 기획사들과 방송사의 밀월관계 속에서 유지되어 왔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장르의 다양성? 당연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연말특집으로 기획된 쇼 프로그램에서 몇몇 아이돌 그룹들이 타 그룹의 노래를 콜라보레이션하며 불렀는데 그다지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는 웃지 못할 뼈있는 농담이 있듯이, 늘 비슷비슷한 코드와 춤의 반복이 있었을 뿐이다. 결국 연제협의 이 얘기는 무언가 대단한 대의를 갖고 얘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밥그릇 싸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중들이 연제협의 논리에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그 비판이 <무한도전>을 비판하는 듯한 뉘앙스를 품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연제협의 논리 속에 ‘대중’을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대중음악이 아닌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대중들의 선택은 그 자체로 옳을 수밖에 없다. 음악의 퀄리티를 얘기하지만 퀄리티가 높다고 해서 대중들이 반드시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이것은 전문가들의 오만이다. 도대체 음악의 퀄리티를 순위 매길 수 있는 기준이란 것이 어떻게 존재한단 말인가.

 

방송사가 늘 비슷비슷한 음악만 음원차트에 올라오던 것을 교란(?)한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방송사가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내놓는 음원들이 그렇다. <나는 가수다>가 그랬고, <슈퍼스타K>가 그랬으며, 지금도 <K팝스타>나 <위대한 탄생>은 계속해서 새로운 음원들을 차트에 내놓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음원들은 과연 ‘교란’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기존 가요계에 악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대중들이 이들 오디션 프로그램에 열광했던 것은 매번 판에 박은 듯이 찍혀져 나오는 기획사 음악들에 지치고 식상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수다>는 상대적으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엄청난 가창력의 가수들을 복원해냈고 ‘듣는 음악’을 되살려냈다. <슈퍼스타K>나 <K팝스타>는 기획사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아직은 미완의 보석들을 대중들과 함께 찾아냄으로써 진정한 ‘대중가수’의 탄생을 가능케 했고 음악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서도 큰 기여를 했다. 버스커버스커 같은 밴드를 어떻게 기존 기획사가 발굴해낼 수 있을 것인가. 발굴했다 해도 기존 트렌드에 맞춰내느라 본래 색깔을 다 지워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음악의 다양성 운운하거나, 음악의 퀄리티를 운운하기 전에 가슴에 먼저 손을 얹을 일이다. 다양성과 퀄리티를 떨어뜨린 것은 오히려 기존 기획사들일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이렇게 얘기하면 한류와 K팝을 만든 장본인들이 누구냐는 식의 질문을 던질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시 그 질문을 되돌려보자. 과연 한류와 K팝을 만든 장본인들은 진정으로 몇몇 기획사들과 거기 소속된 가수들일까. 아니다. 그들 이전에 대중이 있었다. 우리의 한류를 만든 것은 그것을 소비해주고 때로는 꼼꼼한 비판과 애정어린 시선으로 꾸준히 관심을 가져준 대중들이다.

 

그리고 바야흐로 그 대중들이 생산된 것을 그저 소비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스스로 생산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누구나 카메라로 찍고 편집하고 올릴 수 있는 미디어 변화가 영상의 대중화 시대를 만들었듯이, 이제는 누구나 프로그램 몇 개를 받아 간단하게 작곡을 할 수 있는 음악의 대중화 시대가 도래 하고 있다. 이제 음악을 즐기는데 있어서 전문가와 일반인의 경계는 그만큼 얇아졌다. 문화의 일상화 경향은 대중의 시대가 보여주는 가장 특징적인 현상이다. 당연히 연제협 같은 기득권을 누리던 전문가 집단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번 박명수가 만든 일련의 곡들은 전문가가 같이 하지 않았던 순수 초보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불안감을 더 증폭시킨 것이 사실이다.

 

전문가들의 시대는 수직적 사회 체계 속에서 그 정점을 찍었다. 그들은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일종의 필터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나 문화에 있어서 순위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과거 1등 짜리 곡이 음악적 성취도에 있어서도 1등이라고(사실 이런 순위 자체가 어렵다)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저 수직적 사회 체계에 대한 대중들의 수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누구나 작곡을 하고 싶으면 간단한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약간의 교육을 받으면 컴퓨터만 갖고도(심지어 스마트폰으로도) 곡 하나쯤은 뚝딱 만들 수 있는 시대다. 그러니 순위 같은 수직적 개념은 무의미해진다. 다만 모든 것이 수평적으로 나열되고 그것이 다양성의 가치로 평가받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번 <무한도전> 음원이 음원차트 상위에 랭크되면서 생겨난 논란과 잡음은 이미 접어든 음악의 대중화 시대로 인해 수직적 차트의 개념이 무의미해져 가는 시대의 징후처럼 보인다. 이미 많은 대중들은 음원차트 1위를 그 곡의 가치 순위로 바라보진 않는다. 100위의 곡이 나열되어 있다면 그저 다양한 100곡이 있을 뿐이다. 그 중에 일 년에 한두 번 올라오는 <무한도전>의 음원이 있은들 무슨 큰 문제일까. 제발 이른바 전문가라고 하는 분들은, 대중들의 음악을 바라보는 달라진 시선을 이번 기회에 다시 보길 바란다. 대중음악은 결국 대중들의 것이다.

사극과 의드의 만남, 그 진화의 계보학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함부로 훼손할 수 없다는 <효경>에 실린 공자의 말은 동양의학에서 외과의 영역을 위축시켰다. 칼로 째고 바늘로 꿰매는 외과술은 이 효를 근간으로 하는 동양의 가치관과 부딪치면서 좀체 빛을 보지 못했던 것. 하지만 드라마는 사정이 조금 다른 것 같다. 사극과 의학드라마라는 두 장르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강력한 극성 때문에, 최근 사극은 과거에는 좀체 존재하지 않았던 외과의에 주목하고 있다.

 

'마의'(사진출처:MBC)

<마의>에서 백광현(조승우)은 뼈가 썪어 가는 부골저를 치료하기 위해 스승인 고주만(이순재)의 뇌수술을 감행했다. 머리에 구멍을 뚫고 그 병변에 직접 약재를 투입했던 것. 하지만 파상풍 부작용에 의해 스승이 죽게 되자 도망자 신세가 되어 중국까지 흘러들어간 백광현은 다시 그 부골저라는 병과 마주하게 된다. 그는 부골저를 앓는 청나라 황비를 고쳐 조선으로 돌아오려고 하지만 스승을 죽게 했다는 트라우마는 그를 괴롭힌다.

 

이처럼 <마의>는 뼈에 구멍을 내고 살갗을 갈라 병변을 제거해내는 외과술을 보여준다. 조선시대라는 배경에 외과술은 그 자체로 볼거리를 제공한다. 즉 태반이 뒤틀어져 옆구리로 비어져 나온 아기를 수술로 받아내는 장면이나, 유방에 종양이 생긴 처자를 외과술로 치료하는 장면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외과술은 단지 볼거리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당대 신분사회 체계 속에서 외과를 천대하는 시선과의 싸움은 그 자체로 현 시대적 의미를 담아내기에 용이하기도 하다.

 

백광현이 인의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마의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말을 고치기 때문에 외과술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병을 바라보는 시선도 양반 상놈의 구분 없고 심지어 동물과 인간의 구분이 없는 바로 그 똑같은 몸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인식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마의>에서 백광현이 대단한 것은 그 놀라운 손기술이 아니라 신분과 사회와 풍습의 제약 속에서도 인간의 몸을 똑같은 생명으로 바라보는 그 시선일 것이다.

 

바로 이 생명에 대한 현대적인 가치는 과거의 신분제 같은 가치와 충돌을 일으키면서 의미 있는 갈등들을 만들어낸다. 한 촉망받는 인물의 성장이 태생적으로 차단되는 조선 사회의 경직성은 이 시대의 청춘들이 겪고 있는 ‘끊겨진 성장의 사다리’를 환기시킨다. 바로 이 천한 태생 때문에 심지어 생명을 살려낸 외과술조차 천시하는 세상이다. 사람 몸에 칼질을 하는 것은 ‘백정’이나 하는 짓이라 치부하며 오히려 그 앞길을 막아서는 행위는, 작금의 실력이 아닌 태생으로 미래가 결정되는 우리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제중원>에서 그 주인공인 황정(박용우)이 백정이었다는 사실은 조선에서의 외과술을 소재로 하는 사극이 어떤 동일한 시각을 갖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구한말 서양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제중원’ 같은 서양식 의료기관을 세우기 시작하던 그 혼돈의 시기에 황정은 소 잡는 칼을 사람 살리는 칼로 변모시킴으로서 근대적인 인간을 탄생시킨다. <제중원>에서 우두백신을 만들어 예방접종을 하는 장면은 그래서 근대적 사고방식, 즉 과학적 사고방식을 조선사회에 접종하는 장면처럼 그려진다. 어느 정도 생채기가 남겠지만 그것은 결국 합리적인 근대적 이성을 형성해내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제중원>은 사극과 의학드라마의 하이브리드를 시도한 공적이 컸지만 초반의 신선한 발상과 시도가 드라마의 과정의 재미로는 이어지지 못한 점이 있다. 후반부로 와서는 본래 하려던 이야기에서 자꾸만 멜로로 주저앉는 안타까움을 보였던 것. 하지만 이 하이브리드의 가능성은 이후 사극과 의학드라마의 접목을 하나의 트렌드로 만들었다. <닥터 진>과 <신의>는 이 하이브리드에 대한 욕망이 SF와 판타지까지 나간 경우다.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했던 <닥터 진>은 조선으로 갑자기 떨어지게 된 진혁(송승헌)이 생명을 구해내려는 의사 본연의 마음과 그로 인해 뒤죽박죽 되어버리는 역사와의 대결구도를 흥미롭게 그려냈다. 반면 <신의>는 타임 터널을 통해 고려말로 들어가게 된 성형외과의 유은수(김희선)와 최영(이민호)의 만남을 다뤘지만 본격적인 의학드라마와 사극의 접목이라기보다는 멜로에 머무는 한계를 보였다. 어쨌든 두 작품은 SF나 판타지라는 장르적 장치를 등에 업고 있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역사극이나 외과술에 대한 리얼한 접근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런 의학드라마와 사극의 하이브리드를 보여준 작품들의 계보를 통해 바라보면 <마의>가 가진 가치를 새삼 느낄 수 있다. <마의>는 이 하이브리드를 마의라는 당대의 직업적 성격에서부터 끄집어내 자연스럽게 조선사회와 외과술을 연결시켜내면서도 동시에 그 이병훈표 사극 특유의 미션 구조를 통해 대중성까지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광현의 흥미로운 성장과정을 자연스럽게 보다보면 우리는 거기서 조선사회와 비견되는 우리 현재의 사회를 바라볼 수 있고, 현대적 가치가 더 돋보이는 생명에 대한 존엄을 발견할 수 있다. 사극이 의학드라마와 만나 생겨난 진화는 그래서 대중성과 진지함을 모두 잃지 않는 <마의>에 의해 어쩌면 꽃을 피우고 있다고 여겨진다.

무엇이 학교를 눈물 흘리게 하나

 

한 중학생 아이는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투신자살했다. 아이의 엄마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내용이 유서에 적혀있는 것을 보고는 심지어 “무슨 소설을 본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같은 또래 아이들이 벌을 세우고, 전선으로 목을 감고 끌고 다니고... 얼마나 그것이 고통스러웠으면 자살로 그 맞는 아픔을 더 이상 끝내고 싶었을까.

 

'학교2013'(사진출처:KBS)

<SBS스페셜>이 기획한 <학교의 눈물>은 사회면을 뜨겁게 만들었던 대구에서 벌어진 고 권승민군에게 벌어진 끔찍한 학교폭력과 자살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가족 모두가 우울증에 그냥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고, 특히 권승민군의 형은 “가해자 애들 다 죽여버리고 자기도 죽여버리겠다”며 피가 나도록 벽을 주먹으로 쳐댔다고 했다. 왜 안 그렇겠나. 자신들의 일부 같은 가족이 그런 처참한 고통을 겪고 세상을 버렸는데.

 

문제는 가해자의 44%가 피해경험이 있다고 말한 것처럼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로 둔갑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한 왕따를 심하게 당해왔던 아이는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했던 친구가 배신하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친구를 때려 가해자가 되었다. 그 아이는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 행동을 후회하게 되었지만 결국 학교는 아이에게 자퇴를 권유했다.

 

한편 가해자가 되어버린 아이 역시 처음에는 아주 소소하게 시작되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무려 십여 명을 상대로 돈을 뜯어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또 여전히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며 담배 심부름을 하는 아이는 그 분노를 가족에게 풀기도 했다. 도대체 우리네 학교는 어째서 학생들이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되어 뒤늦게야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걸까.

 

다큐멘터리 <학교의 눈물>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서 드라마 <학교 2013>은 그 단서를 제공해준다. 끝없는 입시경쟁으로 학생들조차 선생님에게 입시 관련 공부만을 요구하고, 학교는 오로지 명문대에 얼마나 많이 보내는가 같은 실적에만 혈안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학생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다. 그들은 늘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분노를 품고 있거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 청소년기에 품어야 할 꿈같은 것은 꿀 여유조차 없다.

 

도대체 무엇이 이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마치 하루하루를 버텨내야할 시간으로 만들어버린 걸까. 일진이었다가 사고를 친 후 전학 와서 마음잡고 살아가려 노력하는 고남순(이종석)이나, 그의 친구였지만 피해자가 되어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선수의 꿈을 포기하게 된 박흥수(김우빈)나, 그저 공부하는 기계가 되어버린 송하경(박세영),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비뚤어져 버린 오정호(곽정욱), 치맛바람에 휘둘리는 김민기(최창엽) 같은 아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원하지 않았어도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되어버린 아이들이다.

 

<학교의 눈물>에서 학교폭력의 가해자들에게 판결을 내리던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학교폭력의 일차적 책임은 아이가 아닙니다. 사회가 만든 겁니다. 이 아이들 전부 대한민국의 아이들 아닙니까.” 결국은 도무지 이해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일을 저지른 아이들을 그 벼랑 끝까지 내몬 것은 결국 어른들이다. 학교가 아이들의 꿈이 되지 못하고, 아이들을 경쟁이라는 매질로 학대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학교의 눈물은 그칠 수 없을 것이다. <학교의 눈물>이 실험하겠다는 ‘소나기 학교’에 자꾸만 희망을 걸게 되고, <학교 2013>의 이상처럼만 보이는 정인재(장나라) 선생이 현실이 되기를 기대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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