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는 어떻게 대중들을 대변했나

 

이병헌 주연의 영화 <광해>는 자꾸만 ‘광대’로 읽힌다. 그 영화 속 주인공이 다름 아닌 기방에서 왕 흉내 내며 웃음을 주는 대가로 살아가는 광대다. 그 광대가 광해를 대신한다. 처음엔 연기였는데 하다 보니 점점 왕의 역할을 제대로 해나가기 시작한다. 광대가 광해가 되어 광해보다 더 민초들을 생각하는 정치를 하게 되는 이야기. 1천만 관객 돌파에 스크린 독점과 지나친 마케팅이 일조한 것이 사실이지만 <광해>의 흥행에는 바로 이 ‘광대’라는 위치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

 

'강남스타일'과 '광해'(사진출처:YG엔테테인먼트, 영화 광해)

지금으로 치면 연예인에 해당할 것이다. 대중들에게 값싼 대중문화를 통해 심지어 희망까지 주는 존재. 청소년들 세 명 중 한 명이 희망하는 직업. 물론 그만큼 치러야할 대가도 만만치 않지만 대중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그런 사람들. 영화 <광해> 속 하선(이병헌)은 분명 작금의 연예인을 빼닮았다.

 

요즘 연예인들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고 그런 발언이 대중들의 귀에 쏙쏙 들어온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고 보니 영화 속 하선이 던지는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명분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 갑절 백 갑절은 더 소중하오!”라는 대사는 SNS 시대에 때론 소셜테이너들이 던지기도 하는 속 시원한 한 줄 촌철살인 그대로다. <광해>는 여러모로 광대로 읽힌다.

 

또 한 명의 광대가 있다. 이 시대를 온통 말춤으로 들썩거리게 만든. 바로 싸이다. 광대나 딴따라라는 표현은 어딘지 비하적인 뉘앙스가 있어 많은 연예인들이 피해왔던 것이 사실이지만, 싸이는 아예 자신이 광대임을 드러냈다. “내 직업은 광대, 떴다고 모범적으로 살지 않겠다.” 싸이의 이 발언은 아예 광대의 본분과 철학을 담고 있다.

 

월드스타니 한류스타, 혹은 국민가수(?) 같은 호칭을 거부하고 국제가수라는 애매한 명칭을 스스로 부여한 것에도 광대의 철학이 묻어난다. 국제가수라는 명칭에는 국가나 민족이라는 뉘앙스가 없다. 그저 해외에도 활동하는 가수라는 의미만 있을 뿐. 광대는 국가나 민족의 부름에 구획되어 모범적으로 억지로 살고 싶지 않았던 거다. 저 하선이 저잣거리에서 왕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웃음거리로 만들며 살아가듯이. 저 하던 대로 그대로.

 

사실 ‘강남스타일’이 미국에서 빵 터지기 전까지 국내에서 싸이에 대한 관심은 그냥 그랬다. 국가가 관심을 가졌던 적도 없다. ‘라잇나우’ 같은 곡에 19금 딱지를 붙이는 것이 국가가 가진 관심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비롯되어 전 세계로 싸이에 대한 관심이 번져나가자 상황은 역전되었다.

 

시청 앞 광장이 월드컵을 재연하고, ‘라잇나우’는 19금 딱지를 떼었으며 심지어 국가는 싸이에게 훈장을 부여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해외에 그만큼 우리나라를 알렸으니 훈장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부가 대중문화를 이끌어가는 이 시대의 광대들을 위해 해주는 것이 고작 결과를 만들어낸 자들을 공치사 하는 일 밖에 없는가 하는 의구심은 있다. 이것은 싸이의 공을 치하하는 것인가 아니면 싸이에게 훈장을 줌으로써 정부도 한 일이 있다는 식의 또 다른 숟가락 얹기인가.

 

사실 정치인들보다 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이 시대의 광대, 연예인들이다. 하지만 지금껏 연예인들은 정치적인 상황에 이용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문제는 시대가 바뀌었다는 거다. 정치가 대중문화에 종사하는 연예인들을 딴따라 취급하며 저 발톱의 때처럼 바라보던 시대가 가고, 이제는 대중문화가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올해 대선에서 3강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가 모두 <힐링캠프>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제 정치인들은 어떻게 하면 대중문화라는 말 등 위에 올라탈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저마다 말 춤을 추며 광대 싸이를 코스프레 하고 있다. 이것이 대중의 시대의 새로운 정치 스타일이다.

 

<광해>가 광대로 읽히고, 싸이가 스스로를 광대로 내세우게 된 건 대중문화가 이제 우리네 정치적 입장까지를 대변해주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니 제발 대중문화나 광대를 우습게 보지 말라. 선거 때 반짝 광대 흉내 내고는 막상 정치권에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 싶게 저 <광해>의 신하들처럼 저들 이익에만 휘둘리면서, 대중문화의 토대와 저변을 마련해주기 보다는 뜬 대중문화에 서둘러 숟가락이나 얹는 그런 짓은 하지 말라. 저 왕을 연기한 광대가 대중들의 입을 빌려 한 그 준엄한 꾸짖음을 잊지 말라.

송중기, 나쁜 남자도 착한 남자로 만드는

 

송중기는 독특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여리디 여릴 것 같은 꽃미남의 외모를 갖고 있지만 앙다문 입술과 살짝 미간이 좁혀지면서 나오는 대사의 톤을 들어보면 강한 내면이 느껴진다. 밝게 웃으면 착하디 착한 미소년의 모습이지만, 분노에 한껏 일그러진 얼굴은 순간 분노의 화신으로 변신한다.

 

'착한 남자'(사진출처:KBS)

이 이중적인 이미지는 송중기를 그저 꽃미남에 머물지 않게 하면서도, 동시에 배우라는 무게에 침잠하지 않게 해준다. 그는 <뿌리 깊은 나무>의 폭력적인 아버지이자 왕인 태종(백윤식) 밑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고민하는 진지한 왕이었지만, 동시에 <런닝맨> 같은 가벼운 예능 프로그램에서 꽃미남을 무기로 기분 좋은 웃음을 전하는 캐릭터가 되기도 한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이하 착한 남자)>는 송중기의 이중적인 이미지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는 작품이다. 제목이 드러내듯 <착한 남자>의 강마루(송중기)는 ‘착함’과 ‘나쁨’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이다. 강마루는 자신을 버린 한재희(박시연)에게 복수하기 위해 서은기(문채원)에게 접근하는 나쁜 남자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재희에게 버림받고 서은기를 통해 구원받는 착한 남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착한 남자>라는 드라마의 핵심은 바로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캐릭터들이 겪는 내면적인 갈등에 있다. 서은기 역시 아버지가 새 여자(한재희)를 끌어들이자 못 견디고 도망치다 결국 죽게 된 엄마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까칠할 정도로 강한 자존심을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을 보듬어줄 그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하는 한 여자의 모습을 숨기고 있다. 이것은 한재희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욕망을 위해 뭐든 하는 인물이지만, 그러면서도 최후의 보루처럼 강마루를 마음에서 지워내지 못하는 천상 여자다.

 

결국 <착한 남자>의 인물들은 욕망으로서의 나쁜 존재와 사랑으로서의 착한 존재가 공존한다. 이 모든 인물들의 이중적인 욕망과 사랑의 변주곡을 그 중심에서 잡아주고 있는 존재가 다름 아닌 송중기가 연기하는 강마루라는 캐릭터다. 그는 욕망에 눈먼 한재희에게 사랑이라는 무기로 복수하려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송중기에 의해 욕망이 점점 지워져버린 서은기라는 가녀린 내면의 여자를 통해 한재희에게 복수의 형태로 보여진다.

 

사실 꽃미남이라는 표현이 그렇듯이, 여자처럼 곱상한 얼굴은 송중기가 가진 배우로서의 다양한 가능성을 오히려 가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의 초창기 작품들인 <트리플>에서도, 심지어 <성균관 스캔들> 같은 사극에서조차도 그는 꽃미남의 이미지 속에 갇혀 있었다. 그것이 깨진 것은 바로 <뿌리 깊은 나무>에서 그가 젊은 이도의 역할을 해냈을 때부터다. "내가 조선의 왕이다! 감히 왕을 참칭하지 말라!"고 아버지 태종에게 소리치는 순간, 그 유약해 보였던 꽃미남의 껍질은 드디어 깨져버렸다.

 

그래서 <착한 남자>라는 드라마가 가능한 것은 이 꽃미남의 껍질이 깨지면서 ‘착함’과 ‘나쁨(혹은 강인한)’의 이중적 스펙트럼을 완성한 송중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쁜 짓을 해도 착하게 여겨지는 그 마술 같은 이미지가 없었다면 이중적인 의미의 <착한 남자>가 탄생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얘기다. 이로써 송중기는 <착한 남자>를 통해 자기만의 확고한 연기영역이 생긴 셈이다. 앞으로 이 장래가 촉망되는 배우는 얼마나 더 넓은 연기의 영역을 갖게 될까.

유재석과 김병만, 우리 시대의 리더십

 

대선이 가까워 오면서 대선주자들의 공약은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언제 공약이 없어서 나라가 이 지경이 됐나. 아마도 대선을 대하는 대중들의 마음은 천만 번의 공약보다는 단 한 번의 실천에 더 진정성을 느낄 게다. 이러한 대중들의 정서를 가장 잘 말해주는 두 인물이 있다. 바로 유재석과 김병만이다. 이 두 대중들의 영웅은 이 시대가 원하는 리더십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예능 프로그램이 리더십을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성을 갖게 된 것은 프로그램들이 집단 MC체제로 운영되고, 그 안에 매번 도전적인 미션을 부여하게 되면서다.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시대를 연 <무한도전>이나 <1박2일>이 대표적이다. 이들 프로그램들은 대중들이 몰입할 수 있는 서민을 대변하는 캐릭터들을 팀으로 모았다. 그러니 그 팀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에 때론 대중정서가 작동하는 방식은 정치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유재석은 우리에게 겸손과 성실과 배려의 아이콘이다.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어떤 이들에게도 소홀함이 없다. <무한도전>이나 <런닝맨> 속에서 단 몇 초로 지나가 버리는 유재석의 ‘착한 손’은 어김없이 대중들의 눈에 발견되어 칭찬받는다. 그것은 억지로 흉내 내거나 의도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저 습관처럼 배어있는 품성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방송이 스쳐 보낸 것도 대중들은 굳이 찾아내게 만드는 것이다.

 

<무한도전> 300회 특집에서 유재석이 후배들에게 자신이 사라질 때를 대비해 ‘준비를 하라’고 얘기하는 장면은 그의 겸손과 성실과 배려를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유재석의 리더십이 대중들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그의 리더십이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공존의 의미를 드러낼 때다.

 

과거 스키 점프대를 오르는 <무한도전>의 미션에서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가는 길을 밑에서부터 받쳐주며 “포기하겠다는 말만 하지 마라”고 했던 장면은 그의 함께 하는 리더십이 가장 잘 드러났던 사례다. 또 <런닝맨>에서 <슈퍼7> 콘서트 논란으로 하차선언을 하기도 했던 개리에게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마”라고 소리쳤던 장면에서도 그 리더십은 빛을 발했다.

 

이런 유재석의 면모를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이가 바로 김병만이다. 유재석이 <무한도전>과 <런닝맨>의 팀을 꾸려가고 있다면, 김병만은 병만족의 족장이다. 정글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그는 리더십을 발휘해 모두를 생존하게 해야 한다. 이 <정글의 법칙>의 환경은 고스란히 작금의 대중들이 매일 겪고 있는 혹독한(심지어 진짜 정글에 로망을 느낄 정도로) 도시 정글의 삶을 대변한다. 김병만이 이 시대 대중들이 원하는 리더십과 만나는 지점이다.

 

그가 정글에서 부족(?)을 이끄는 방식은 묵묵히 성실하게 일을 하는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솔선수범해 나서고, 환경에 생존 적합한 주거공간을 뚝딱 뚝딱 만들어내고 그 안에 부족들이 살을 부비고 살아갈 따뜻한 온기를 부여한다. 그러면서도 그 힘든 환경에서조차 그 힘겨움을 소재로 부족원들에게 웃음을 주려고 노력한다. 정글을 빠져나오며 정작 자신도 힘들어 눈물을 펑펑 흘리기도 하지만 그런 모습이 부족들을 힘겹게 할 거라는 걸 알기에 그는 늘 담담한 얼굴에 광대 같은 웃음을 짓는다.

 

<정글의 법칙>을 자세히 보면 놀랍게도 김병만의 멘트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제작진들이 “이제 일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정글에 들어가면 묵묵히 누가 시키지 않아도 구석에서 일을 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그의 과묵할 정도로 일에 빠져 있는 모습은 편집 과정에서 자막이 김병만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장면으로 자주 쓰이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만족들은 김병만에게 의지하고 그의 말을 따른다. 그의 경험을 믿는 것이고, 그 말이 아닌 몸으로 보여준 것에 대해 부족들이 신뢰를 보내는 것이다.

 

유재석과 김병만이 이 시대의 정치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저 말이 아니라 실천력 있는 행동이며, 땀이 주는 신뢰다. 말로는 함께 가겠다 하고는 혼자만 배를 채우는 그런 사리사욕이 아니라 심지어 자신이 떠난 후의 시간을 배려할 정도로 함께 가는 리더십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개미 같이 작아 보이는 서민들을 진짜 개미 취급하는 게 아니라, 항상 낮은 자리에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낮추는 겸손과 배려의 리더십이다. 지금 대선주자들은 과연 이러한 리더십을 갖추고 있는가.

<런닝맨>이 본 예능의 미래

 

미래의 예능은 어떤 형태일까. 어찌 미래를 점칠 수 있겠냐마는 때론 현재의 징후가 미래를 살짝 먼저 보여주기도 한다. <런닝맨>의 ‘미래 딱지’가 등장한 ‘미래를 보는 자’ 특집 편이 그렇다. 사실 예능의 리얼 게임에서 ‘미래를 봄으로써 현재를 바꾼다’는 것은 지금껏 시도할 수 없었던 불가능의 영역처럼 여겨졌다. <런닝맨>이 제 아무리 기존 영상 콘텐츠의 장르들, 예를 들어 멜로에서 액션, 미스테리, 추리 등등을 잘 흡수했다고 해도 SF는 무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리얼 게임에서 미래란 늘 물음표의 영역에 남아있기 마련이다.

 

'런닝맨'(사진출처:SBS)

하지만 ‘미래를 본다’는 설정이 가능한 것은 <런닝맨>이 가진 게임쇼적인 속성, 즉 리얼과 버라이어티의 절묘한 지점 덕분이다. 게임은 가상의 놀이이면서 그 과정과 결과는 리얼이다. 즉 게임의 룰과 구성은 가상일 수 있지만, 그 속에서 벌어지는 과정은 실제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은 룰을 어떻게 구성하고 짜느냐에 따라서 게임은 전혀 다른 스토리텔링을 할 수가 있다. 거기에는 리얼한 상황도 있지만 룰에 의해 지켜지는 상황극적인 요소도 있게 마련이다.

 

<무한도전>이 처음 이 게임쇼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거기에 확고한 캐릭터들이 있고, 그들이 새로운 상황(게임적인)에 언제든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태호 PD는 이들에게 때론 유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예를 들면 돈 가방을 갖고 튀는 설정 같은)을 부여하고, 그들이 보이는 지나칠 정도로 승부에 집착하는 진지함을 포착함으로써 그 게임이 주는 긴박감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사소한 게임에 목숨을 거는 데서 발생하는 웃음을 만들어냈다.

 

<런닝맨>은 <무한도전>에서 이 한 곁가지를 가져와 새로운 하나의 영역을 구축해가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역시 여행이라는 아이템을 가져와 하나의 영역을 구축한 <1박2일>이 하는 게임이 조금은 단순하고 촌스러운(바로 그것이 <1박2일>만의 맛이다) 느낌을 준다면 <런닝맨>은 대단히 세련되고 창의적인 게임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1박2일>이 복불복 게임에 집착하게 되면 그 본분인 여행지 소개가 빠져있다는 비판을 받지만, <런닝맨>은 거꾸로다. 오히려 게임 그 자체가 식상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진화시켜야 생존할 수 있다. ‘미래를 보는 자’ 같은 과감한 시도가 가능한 것은 그 때문이다.

 

<런닝맨>이 미래 예능의 징후를 보이고 있는 것은 그것이 원형적인 게임의 형태를 그대로 갖고 있지만 그 스토리텔링은 끝없이 변주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미래를 보는 자’의 미래 딱지는 사실 액면으로 보면, 게임에서 죽어도 한 번 더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아이템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미 죽은 자가 미래 딱지를 바닥에 던지며 “미래를 보는 자!”를 외침으로써 그 상황이 미래로 바뀌어 다시 반복되는 장면으로 연출되자 이 게임쇼는 전혀 다른 스토리텔링을 구현한다. SF적인 장르적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사실 게임이란 아주 오래 전부터 원초적인 형태로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온 것들이다. 마치 달리기나 술래잡기, 보물찾기처럼. 하지만 여기에 카메라의 트릭과 캐릭터들의 룰에 입각한 상황극, 그리고 리얼한 반응이 엮어지면 사실상 무한한 스토리텔링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결국 대중들이 즐기는 것은 원형적인 게임이 주는 놀이의 긴박감보다는 바로 이 스토리텔링이 주는 묘미라고 할 수 있다. 같은 것이라도 어떻게 다른 형태로 보여주느냐에 미래의 예능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런닝맨>의 ‘미래를 보는 자’는 이미 초능력자 특집에서 그 전조를 보인 적이 있다. RPG형의 캐릭터쇼가 가능한 이 게임 형태는 그러나 ‘미래를 보는 자’를 통해 좀 더 구체화된 느낌이다. ‘미래를 본 자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설정으로 일종의 업보(?) 상황으로 아줌마 부대가 달려들고, 안대를 착용한 채 이상한 곳으로 끌려가며, 때로는 서로의 이름표가 바뀌는 상황은, 이 ‘죽어도 다시 사는’ 단순한 설정을 ‘미래를 보는 자’로 스토리텔링함으로써 더 나아간 진화의 산물이자 덤이다.

 

세상에 새로운 게임이 없듯 새로운 예능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운 방식으로 스토리텔링 하는 게임이 있고 예능이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런닝맨>은 그 끝없는 스토리텔링의 진화를 통해 우리에게 예능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당장의 다소 낯설고 어려운 지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미래의 어느 날 우리가 <런닝맨>의 영상을 보게 된다면 어떨까. 어쩌면 미래의 그들에게 웃음을 주는 예능의 원류를 거기서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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