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우파', 오징어 게임 판에서도 이들은 모두 우승자였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종영했다. 최종 우승은 홀리뱅 크루. 2위는 훅 크루에게 돌아갔다. Mnet 서바이벌 오디션으로서 오랜만에 마지막 회까지 집중하게 한 프로그램이었지만, 그건 누가 우승을 할 것인가가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들의 멋진 무대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픈 마음이 컸다. 그 무대에서는 멋진 춤이 있고, 춤을 통해 전해지는 메시지가 있고, 치열하지만 그 경쟁마저 무화시키는 애티튜드와 그 어떤 강연에서도 들을 수 없는 인사이트 가득한 명언들이 쏟아졌으니 말이다. 최근 2년 넘게 고개를 숙였던 Mnet을 화제의 중심에 놓게 해준 <스트릿 우먼 파이터>. 하지만 그 공은 온전히 댄서들에 있었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도 그 시작은 여타의 Mnet 오디션 서바이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등장부터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이기려는 크루들의 노골적인 욕망들의 부딪침을 보기 불편할 정도로 각을 세웠다. 미션 자체가 그랬다. 첫 번째 미션이 ‘약자 지목 배틀’이었다. 걸 그룹 출신이라는 이유로 원트의 이채연은 다른 크루들이 물어뜯는 먹잇감으로 연출되었다. 같은 팀에서 활동하다 갈라져 골이 생긴 홀리뱅의 허니제이와 코카앤버터 리헤이의 대결을 세웠고, 라치카 가비와 훅 아이키의 대결은 환불원정대의 안무를 두고 이들이 벌였던 대결을 끌어들여 각을 세웠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정복과 굴욕 같은 자극적인 단어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면서 제작진은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일종의 ‘오징어 게임’이라는 걸 강조했다. 이미 <언프리티 랩스타> 같은 서바이벌 오디션을 통해 보여주곤 했던 자극적인 경쟁구도를 내세웠고, 판정이 나는 순간에 여지없이 인터뷰 목소리로 들어간 양자에게서 자신들이 반드시 이긴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보기 불편한 지점까지 끌고 올라가는 대결구도는 Mnet이 과거 <슈퍼스타K> 시즌3에서 ‘악마의 편집’이라고까지 불리게 됐던 그 자극점을 재연해 보여줬다. 

 

하지만 이 ‘오징어 게임’ 판을 명승부의 무대로 바꾼 건 다름 아닌 댄서들이었다. 허니제이와 리헤이의 살벌하기까지 했던 댄스 배틀은, 승부가 끝난 후 허니제이가 본인이 패배했으면서도 양팔을 벌려 리헤이를 안아주는 모습으로 한편의 드라마를 썼다. 그 순간 서로 자신들이 훨씬 낫다고 주장하고,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동원하겠다고 한 이들의 욕망은 절실함으로 바뀌었고, 승부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상대에 대한 예우라는 걸 보여줬다. 

 

그래서 이기기 위해 무대 위에서 바지를 벗기까지 했던 가비는 프로그램 시작점에서는 최고의 빌런이 될 것처럼 보였지만 갈수록 그 승부욕이 하나의 캐릭터가 되었고, 유튜브를 통해 가비의 다른 모습들을 발견한 시청자들은 승부의 세계에서 이기고픈 욕망을 끝까지 드러내지만, 그 바깥에서는 상대방을 리스펙트하는 그의 솔직함에 매료됐다. 

 

제작진이 첫 회에서부터 프라우드먼의 모니카나 립제이를 다른 크루들의 ‘선생님’ 격이라고 내세운 후, 마치 사제 간의 대결처럼 무대를 몰아간 부분도 전형적인 Mnet 서바이벌 오디션의 자극적인 선택 중 하나였다. 승부에서는 위아래도 없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 하지만 이 부분에서도 댄서들 특히 모니카 같은 선배들이 오히려 나이를 뛰어넘어 후배들을 예우하는 모습으로 명승부를 이끌어냈다. 오히려 승부에서 나이와 서열 따지는 기성세대의 치졸한 면모들을 여지없이 깨버리는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제작진들이 던진 미션들 중에는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취지와 맞지 않는 것들도 존재했다. 이를 테면 ‘메인 댄서 선발전’은 대놓고 이 댄서들이 가수들 뒤에 서서 잘 드러나지 않던 그 존재감을 대결의 화력으로 활용했고, 메가크루 미션에서는 이른바 ‘연예인 지인 찬스’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맨 오브 우먼’ 미션도 자칫 그 중심에 다시 남성을 세울 수도 있는 문제의 소지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 때마다 댄서들은 제작진이 내놓은 오징어 게임을 명승부로 되돌려 놓는 선택들을 보여줬다. ‘메인 댄서 선발전’에서는 선발 과정까지 치열했지만 함께 할 때는 척척 맞아 돌아가는 합을 보여줬고, 메가크루 미션에서의 ‘연예인 지인 찬스’에 대해서는 모니카가 “자존심도 없냐”는 일갈로 상황을 반전시켰다. 또 ‘맨 오브 우먼’ 미션에서 댄서들은 남녀의 성을 뒤바꿔 놓거나, 성을 무화시켜버리는 의상을 입고, 박재범 같은 연예인을 데려와서도 그저 크루의 한 부분처럼 활용하는 방식으로 그 한계를 뛰어넘었다. 

 

“잘 모르겠고 우리가 제일 잘했고 제일 멋있었어. 그럼 된 거야!” 파이널 무대에서 아쉽게 3등에 그친 라치카의 가비는 그렇게 외쳤다. 최종 우승자에서 멀어졌지만 그들은 이미 우승자였다. 최종 우승자가 된 홀리뱅의 허니제이는 우승소감으로 한국의 댄서들 전부를 상찬했다. “대한민국 댄서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다”며 “이미 멋있기 때문에 자부심 가져도 된다”고 한 것. 2등에 그친 훅의 아이키는 “스우파 댄서들 XX 멋있다!”고 모든 댄서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이들은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서의 성취가 자신들이 아닌 한국의 댄서 전체의 성취라고 강변하고 있었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열풍을 불러온 것은 어찌 보면 그 살벌한 생존경쟁의 무대는 글로벌 신드롬을 일으킨 <오징어 게임>과 같았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드라마를 써낸 댄서들이 있어서다. 이 과정이 감동적이었던 건 우리 모두 어쩌면 비슷한 저마다의 오징어 게임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고, 그 속에서 그 현실을 비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승부에 뛰어들고 욕망을 드러내고 그것을 실현시키려 노력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 

 

또 그렇게 승패가 갈린 후 그러한 경쟁의 판 자체를 무화시키는 상대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 세상은 생존경쟁의 경쟁을 부추기고 있고 그래서 생존과 동시에 이기고픈 욕망이 만들어지지만, 그럼에도 다 함께 이기는 경쟁을 향해 나간 댄서들이 있어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빛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모두 우승자였다.(사진:Mnet)

‘유퀴즈’ 빵식이 아재의 감동... 빵이 아닌 착한 마음이라

유 퀴즈 온 더 블럭

“빵 가져가- 요구르트도 요구르트도 가져가!” 경상남도 남해군의 행복 베이커리의 아침은 빵식이 아재 김쌍식씨가 아이들에게 외치는 소리로 열린다. 등굣길의 아이들은 익숙한 듯 빵과 요구르트를 챙겨간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아저씨에게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빵식이 아재 김쌍식씨는 그런 아이들에게 가족처럼 편안하게 안부를 묻고, 말을 걸어준다. 

 

tvN <유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김쌍식씨는 1년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무료로 등굣길 아이들에게 빵을 내놨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두 시간 정도 일찍 가게에 나와야 한다고 했지만, 그의 얼굴은 베이커리 이름처럼 행복해 보였다. 어려서 잘 산 적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사업이 잘 안돼 어려워졌을 때 주변 이웃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쌍식씨는 빵집을 열면 무료로 나눠주겠다 일찍부터 생각해왔다고 했다. 이전에는 마트에 있어 할 수 없었던 걸 이제 직접 가게를 차려 하게 됐다는 거였다. 

 

빵을 나눠주며 가장 큰 보람을 느낄 때가 있냐는 조세호의 질문에 쌍식씨가 한 답변은 “애들이 학교 갈 때나 올 때나 저를 보고 인사를 다 합니다”였다. 어찌 보면 별 것도 아닐 것 같은 ‘인사’에 보람을 느낀다는 그 말은, 어딘가 보다 큰 것들을 성취하는 것만 인생의 행복일 것처럼 여겨온 생각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안녕하세요”,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그 인사가 보람이라는 것. 쌍식씨의 행복론이 소박해보이지만 결코 작지 않다는 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 행복감에 빵을 계속 만들어 나눠준다는 쌍식씨도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느낀 적이 있다고 했다. 그건 코로나 19로 지난 4,5,6월에 너무 힘들어 아이들에게 요구르트를 나눠주지 못한 일 때문이라고 했다. 빵이야 직접 자신이 만들어 구우면 되는 일이었지만 요구르트는 사서 나눠줘야 해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것. 그 말에 유재석은 적이 놀라는 눈치였다. 요구르트를 살 돈이 없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빵을 구워 아이들에게 나눠줬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힘들 때는 빚을 져가면서까지 빵을 구워 나눠줬다는 쌍식씨에게 유재석은 그렇게까지 하면서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쌍식씨는 “애들 생각하면 안할 수가 없지 않냐”고 되물으며 따뜻하게 웃었다. 의외로 밥 못 먹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며 매일 찾는 아이들이 2,30명은 있다는 쌍식씨는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이 일을 멈출 수 없다는 거였다. 이외에도 20년 가까이 빵 봉사를 해왔다는 쌍식씨는 현재 8개 단체에 정규적으로 빵을 나눈다고 했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1년에 약 2천만 원이나 된다는 것. 한 달에 약 200만원 가까운 돈을 기부하는 셈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 정도면 충분하다며 만류할 정도로 베풀며 살아가는 쌍식씨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난 돈 필요 없다”며 “혼자 사는데 뭐 돈이 필요가 있습니까? 제 쓸만큼만 있으면 돼죠.”하고 말했다. 빵집도 자가가 아닌 월세로 임대를 하고 있다는 쌍식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13년 된 차 하나 있습니다.” 저녁 마치고 통닭에 맥주 한 잔 정도가 자신을 위한 사치라고 부르는 쌍식씨는 그 선행들이 알려져 LG의인상을 수상했다. 몇 번 거부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설득으로 상금을 받아 빌렸던 돈을 갚았다고 했다. 

 

사실 요즘 신문지상에서는 불법적인 투기로 수 백 억을 벌어들였다는 이들의 이야기로 시끌시끌하다. 또 부동산 가격이 수 십 억을 호가하게 된 현실이 자주 신문지상에 오르내린다. 그래서인지 수십, 수 백 억조차 많은 수치로 여겨지지 않아질 정도다. 그런데 그런 불법적인 일까지 벌이면서 채우려는 욕망들로 과연 그들은 어떤 가치를 실현하고 있을까. 쌍식씨의 ‘행복 베이커리’ 이야기는 그래서 귀하디 귀하다.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진짜 행복이 무엇인가를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손님 중에는 백만 원짜리 돈 봉투를 놓고 도망치듯 가버린 커플도 있다고 했고, 자기 모르게 카드로 돈을 더 많이 내고 가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쌍식씨가 나눈 따뜻함이 다시 감사한 마음으로 되돌아오는 그 과정. 그 곳에 진짜 행복이 있는 게 아닐까. 놀라운 건 쌍식씨의 이런 나눔에 대해 아이들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민지는 학교 가는 길에 빵 놓인 거 보면 어때요?” 제작진의 이런 질문에 민지는 “기분이 좋다”고 답했고, “왜 기분이 좋아지냐”고 재차 질문하자 이렇게 답했다. “아저씨의 착한 마음.” 

 

어쩌면 그저 빵 하나처럼 보이지만 그 빵은 아이들의 마음 속에 ‘착한 마음’이 주는 따뜻함을 경험하게 해주고 있었다. 이것은 내 살이다 라며 빵을 나눈 성인처럼 그 빵은 단지 배고픔의 허기만을 채워주는 게 아니라 영혼의 허기까지 채워주고 있었으니 이만한 가치가 있을까. 쌍식씨의 행복론은 수 백 억을 들여서도 얻을 수 없는 가치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사진:tvN) 

‘검은 태양’이 보여주는 조직의 비리 청산 그 어려움

검은태양

“그날 네 동료들을 죽인 건... 한지혁 바로 너야!” MBC 금토드라마 <검은 태양>에서 영상 속 한지혁(남궁민)은 그렇게 말한다. 국정원 임원들이 긴급 소집되어 있었고, 한지혁과 국정원 국내 파트 1차장 이인환(이경영)이 대치하던 상황이었다. 그 영상 속 한지혁의 말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 특히 1년 전 중국 선양에서 동료들을 죽인 자와 이를 사주했을 국정원 내부 배신자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한지혁은 더더욱 충격에 빠졌다.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에게 미리 찍어뒀던 영상을 순차적으로 보내 그 진실을 알린다. 바로 이런 장면은 <검은 태양>이라는 서사가 가진 특이한 지점이다. 국정원이 등장하고 중국에서 벌어진 공작들이 초반에 펼쳐져 애초에는 <아이리스> 같은 전형적인 스파이물처럼 보였던 게 사실이다. 또 항간에는 기억을 찾아가는 <본> 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밀항선에서 마치 지옥에서 돌아온 괴물의 형상으로 1년 전의 기억을 모두 잃은 채 한지혁이 등장하는 강렬한 장면은 그래서 다소 뻔한 스토리로 흘러가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 섞인 기시감조차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과거의 한지혁이 미리 찍어 자신에게 보낸 영상으로부터 차별화된 서사의 변곡점을 찍는다. 한지혁은 국정원 내부의 적폐세력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그들의 실체를 찾아가기 위해 돌아온 것이었다는 것. 드라마는 스파이 스토리가 아닌 추리극 형태로 바뀌었고, 한지혁이 그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국정원의 갖가지 비리들이 등장한다. 민간인 사찰, 대선 개입, 갖가지 간첩 조작사건 등등, 이미 우리에게 충격을 줬던 실제 국정원 비리들이 드라마 속 서사 속에서 얼굴을 내민다.

 

국정원 적폐세력의 몸통으로서 실체를 드러낸 인물은 바로 이인환이다. 그는 국정원 국정원이 선거 개입 등을 위해 민간인을 사찰했던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던 인물이다. 그는 이 여론을 뒤집고 선거 판도를 바꾸기 위해 ‘북풍’을 활용하려 한다. 북한 고위간부인 리동철의 망명을 계획한 것. 하지만 이 계획이 틀어지자 사건을 덮기 위해 모두를 제거한다. 그리고 그 후에도 이인환은 상무회를 통해 아르고스라는 비밀조직을 움직이고(과거 기업 플래닛이 해왔던 개인 정보 수집 선거 개입 등의 활동을 하는 것) 그것으로 정권에 휘둘리지 않는 힘(권력)을 가지려 한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우린 죽어서도 음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라는 거지. 내가 지금까지 이 조직에 있으면서 몇 명의 원장을 모셨는지 아나? 21명이야. 정권이 8번 바뀌는 동안 자그마치 21명의 원장이 손님처럼 여길 다녀갔어. 그리고 그들은 매번 우리 원이 자신들에게 충성하기를 바랐지. 선거에 개입하고 여론을 조작하고 사람들을 사찰하라고 지시했어. 그리고 사라져버렸지. 그 오명들을 모두 우리에게 뒤집어씌운 채! 근데 설명할 수도 변명할 수도 없었어. 그저 침묵해야만 했어. 그게 우리 숙명이니까.”

 

실체를 알게 된 한지혁을 마주하게 된 이인환은 자신이 왜 이런 일들을 벌이게 됐는가에 대한 이유를 그렇게 설명한다. 국정원이 그간 정권에 의해 갖가지 비리와 범죄를 저지르면서까지 이용되고, 사건이 터졌을 때도 결국 그 오명은 시킨 자들이 아닌 국정원이 뒤집어썼다는 것. 그렇지만 그걸 설명하거나 변명할 수도 없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이인환은 결국 이 모든 문제가 ‘힘’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휘둘릴 게 아니라 더 큰 힘을 갖는 독자적인 조직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거기 편승했던 건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한지혁의 말처럼 이인환이 하려는 짓은 저들과 다르지 않다. 결국 이 독자적인 조직으로서의 힘을 갖기 위해 그는 여러 동료들마저 죽음으로 내몰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건, 이인환 같은 악의 실체가 드러났다는 점이 아니라 그 뒤에 존재하는 검은 세력들(그건 아르고스 같은 사조직이 될 수도 있고 국정원의 힘을 이용해온 정권일 수도 있다)이 어떤 짓들을 해왔는가 하는 점이다. 

 

어찌 보면 이러한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중차대한 사건들을 수사하고 그 진실을 파헤치며 비리와 적폐를 청산하는 일이야말로 국정원이 본래 해야 될 일들이다. 하지만 명령 체계로 운용되는 조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심지어 조직의 안위를 위해 같은 동료들에게도 총구를 겨누게 만든다. 한지혁 또한 그런 희생양이 됐던 인물이고, 유제이(김지은)의 아버지라 여겨지는 백모사(유오성)도 스스로 말했듯 한지혁과 비슷한 일들을 겪은 인물이다. 

 

앞서도 말했듯 <검은 태양>이 여타의 스파이액션과 차별화되고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과거의 자신이 무슨 이유에선지 기억까지 지워버린 후 자신을 국정원 안으로 보냈다는 사실이다. 그는 순차적으로 과거에 미리 찍어둔 영상을 현재의 자신에게 보내면서, 마지막 영상을 보기 전 반드시 국정원 내 배신자를 찾아내라고 강변한다. 결국 그 배신자는 이인환으로 드러나지만, 놀랍게도 동료를 죽인 진범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마지막 영상 속 진술을 마주한다. 

 

그렇다면 한지혁은 왜 이렇게까지(기억까지 지운 채) 하면서 국정원 내 배후세력을 찾아내려 했던 걸까. 그것은 거꾸로 기억을 모두 가진 채 국정원 내부의 적폐와 대결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에둘러 말해준다. 조직원으로서 조직의 적폐를 척결하는 일이 ‘기억까지 지울 정도’가 아니면 어려운 일이라는 걸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스파이물처럼 보였던 <검은 태양>은 그래서 뒤로 갈수록 현실감을 드러낸다. 실제 2016년 국정원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갖가지 사건들이 이 드라마가 탄생한 이유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 매 대선 정국 때마다 북풍에서부터 시작해 댓글 조작 같은 방식으로 여론을 좌지우지하려 했던 조직이 있었고 거기에는 이들을 이용하려는 정권 또한 존재했다는 걸 <검은 태양>은 저격하고 있다. 그래서 국정원 스스로 적폐 청산을 하고 새로운 조직으로 탄생하겠다 선언한 그 변곡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과연 <검은 태양>처럼 국정원은 그 조직이 쇄신되고 있을까. 다가오는 대선은 어쩌면 이를 가름하는 시간이 될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검은 태양>을 본 시청자들이라면 다가오는 대선에서 혹여나 벌어질 지도 모를 어떤 사건들조차 이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될 테니 말이다.(사진:MBC)

‘인간실격’, 시청률로 함부로 실격이라 부를 수 없는 드라마

인간실격

“산에요. 산에 갔다가 바다에 갔다가... 음 집에 갔죠.” 한밤중 아무도 없는 기차역에서 철길을 하릴없이 걸으며 마지막으로 타본 기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부정(전도연)이 그 때 “기차를 타고 어딜 갔냐?”고 묻자 강재(류준열)는 그렇게 말한다. 산에 갔다가 바다에 갔다가... 집에 갔다고. 

 

“산에 갔다가 바다에 갔다가...” 라고 강재가 말하곤 잠시 뜸을 들일 때 부정은 살짝 긴장했다. 그 마지막으로 기차를 타본 게 아버지 장례 치르고 화장한 날 엄마와 함께 그 곳에 왔을 때였다는 강재의 말 때문이다. 어딘가 쉽지 않았을 상황이었을 테니 그가 갔다는 산과 바다가 마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런 길처럼 느껴지진 않았을까 걱정해서다. 하지만 그러고는 “집에 갔다”는 강재의 말에 안심한다.  

 

부정이 강재의 말을 들으며 걱정하고 안도하는 건,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에도 죽은 정우(나현우)의 사연이 있는 그 작은 기차역이 있는 마을 저수지를 찾은 적이 있었다. 아마도 절망적이었을 것이고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을 게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이 주는 허함과 절망감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같은 감정을 가졌지만 그 때 저수지를 찾았던 걸 지금은 후회한다고 했다. 강재가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부정이 똑같은 안도감을 느낀 이유다. 

 

JTBC 토일드라마 <인간실격>이 그린 어느 저수지와 작은 기차역이 있는 마을에서 강재와 부정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천문대에 오르고 어쩌다 한 텐트 안에서 같이 밤을 지새게 되는 에피소드는 이 드라마가 담아내려는 위로의 메시지를 잘 보여준다. 아픈 아들을 위해 호스트 일을 하며 번 돈으로 비싼 병원비를 충당해오다 결국 아들이 저세상으로 떠나고 절망감에 저수지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정우. 정우와 저수지는 그래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격을 상실한 듯한 절망을 은유하는 인간과 공간으로 그려진다. 

 

정우의 죽음은 아마도 부정과 정우가 자신의 실존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을 터다. 정신없이 살아내기 위해 살았지만 알 수 없는 ‘허한 마음’. 정우는 ‘역할 대행’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그래서 자신의 존재는 지워진 채 살아가고 있었고, 부정은 아란(박지영)의 책을 대필한 후 그와 갈등을 일으키고 결국 출판사에서도 쫓겨났다. 무언가를 위해 열심히 숨을 쉬며 살아가곤 있지만 자신이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존재가 지워져 있다는 걸 알게 되곤 느끼게 되는 허한 마음. 

 

그래서 부정과 강재는 그 정우가 풍덩 뛰어들었던 저수지를 통해 다시 만난다. 우연히 저수지 근처를 지나다 부정은 그 곳에 마음이 이끌렸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 같은 모습에 누군가 신고해 파출소에 가게 됐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자신을 데리고 가줄 보호자 한 명을 찾기 힘든 부정이었다. 그래서 별 기대 없이 강재에게 ‘보호자 역할 대행’을 요청했고, 놀랍게도 그 먼 길을 강재가 달려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절망의 공간에서 <인간실격>은 부정과 강재를 통해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위로를 건넨다. 아무 것도 아닌 관계처럼 보였고, 마치 돈을 주면 역할을 대행하는 그런 관계처럼 보였던 두 사람은 서로가 겪었던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서 ‘삶’의 의지를 다시금 끄집어낸다. 과거 아버지를 화장된 날 어머니와 무작정 기차를 타고 가다 우연히 가게 된 그 길을 이야기해준 강재는 부정에게 문득 이렇게 묻는다. “어디 집 말고 가보고 싶은데 있어요?” 모르겠다는 부정의 말에 강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산에 갔다가 바다 갔다가 그리고 집으로 갈까요?”

 

그 말은 절망하기도 하고 허한 마음을 갖기도 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그 마음을 채우기 위해 산에도 가고 바다도 가지만 그럼에도 결국 집으로 간다는 위로가 섞인 제안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천문대를 향한다. 강재는 엄마와 함께 오르던 그 길을 부정과 함께 걸으며 그 때 엄마가 천문대에서 하늘 가득 채워진 별을 올려다보며 한참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그 때 어린 강재는 왜 엄마가 울었는지 진짜 몰랐을 터다. 하지만 버스에 두고 온 크림빵과 우유가 아까워서 울었다고 둘러댔다는 엄마의 말을 부정에게 해주는 강재는 이제 어렴풋이 그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지 않았을까. 

 

하늘 가득 반짝 반짝 빛나는 별들을 올려다보며, 엄마는 거대한 우주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가녀린 존재인가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너무 거대한 세상 속에서 먼지처럼 보이지도 않을 인간들이 살아간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먼지들이 마치 저 우주의 별들처럼 반짝인다. 그것이 너무 작고 소소하고 가녀려서 갖게 되는 아름다운 슬픔. 엄마는 그걸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부정과 강재도 그 엄마가 걸었던 그 길을 걸으며 같은 걸 느끼고 있었을 지도. 

 

도대체 무엇이 저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소중한 존재들인 인간을 이토록 ‘자격 운운’하며 실격 처리하는 것일까. 어째서 돈과 지위와 성공의 기준으로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고, 저수지 밑바닥으로 가라앉게 만드는 것일까. <인간실격>은 그런 무례한 세상을 에둘러 일갈한다. 작디작지만 그래서 더 소중하고 위대해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위로’의 말과 손길을 내미는 것으로.

 

안타깝게도 <인간실격>은 시청률이 낮다. 그건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지금의 드라마 시청이 지나치게 당장의 사이다 같은 자극적인 지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물론 답답한 현실에 사이다 한 잔 같은 작품들이 의미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간실격>처럼 묵직한 밥 같은 무게감을 가진 작품을 낮은 시청률로 섣불리 ‘실격’이라 부를 순 없을 게다. 최근 들어 이만큼 진지하게 가슴을 건드리는 드라마를 본 적이 없으니.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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