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문화는 어떻게 대중들과 만났나

누구나 싸구려 커피를 마셔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달달한 맛이 제 아무리 맛좋다는 카푸치노나 에스프레소보다도 더 중독성이 강하다는 것을. 하지만 이런 강한 중독성이 단지 싸구려 커피가 가진 설탕물에 가까운 달달함 때문만일까. 아니다. 싸구려 커피는 어느덧 하나의 문화 감성이 되어 있다. 거기에는 서민들의 피곤함을 풀어주는 대중들의 노곤한 감성이 들어있고, 단 몇 백 원만으로도 누릴 수 있는 그들만의 여유가 들어있다. 장기하가 부르는 ‘싸구려 커피’에는 우리가 흔히 대중문화라고 불러왔던 것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좀 더 본질, 진정성에 가까운 대중의 감성이 녹아 들어있다.

‘싸구려 커피’같은 비주류로 취급되던 인디 감성의 문화가, 주류를 치고 들어오는 현상은 단지 불황을 맞은 탓만은 아니다. 즉 경제적인 논리로 보자면 인디 문화가 가진 저투자 고효율은 불황이 요구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은 단지 대중문화를 숫자적인 관점, 즉 양적 잣대로만 바라보는 잘못된 시각이다. ‘싸구려 커피’의 주류 진입 성공의 이유는 오히려 질적인 부분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류가 가진 상업적인 접근은 자본으로부터 생겨나고 자본이란 투여되는 순간부터 이윤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상품’의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리스크를 줄이는 방법을 쓰게된다. 개성은 이 잣대로 보면 때로는 리스크가 된다. 바로 이 부분은 왜 주류문화가 대부분 비슷비슷한 마치 대량생산된 통조림 같은 맛을 내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자본에서 독립되어 개성을 리스크가 아닌 무기로 장착한 ‘싸구려 커피’는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오는’ 맛이지만 좀더 진심에 가까운 맛을 낸다. ‘싸구려 커피’의 성공을 불황 탓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불황이 오히려 진정성을 더 요구하는 시대적 정황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싸구려 커피’같은 인디 문화들이 주류로 치고 들어오는 풍경을 적지 않게 목도하고 있다. ‘워낭소리’의 기적(이건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현상이다)이 그저 하나의 예외적 사례로 남지 않는 것은 그 뒤를 충분히 이을만한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같은 작품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전셋집까지 뺀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은 영화를 제작하기 전 투자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이유는 자본이 들어오면 그간 함께 일해오던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 만일 그 때 투자를 받았다면 똥파리에는 어쩌면 우리에게 익숙한 얼굴들이 등장하고, 영화 연출도 어쩌면 익숙한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지금 같은 ‘똥파리’만의 아우라를 갖지 못했을 거란 얘기다.

독립영화의 시험대로 불리고 있는 이 영화가 실제로 관객몰이를 해나가고 있다는 것은 인디문화에 대한 달라진 시선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제 인디 문화가 더 이상 싸구려라는 오명으로 불려지는 시대는 지났다.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잣대가 자본의 양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질적인 판단을 유보한다. 싸구려라는 말은 적은 돈(오히려 이 성격이 다른 돈이 질을 만들기도 한다)이 들어갔다는 의미로서는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질이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이제 대중들은 ‘워낭소리’나 ‘똥파리’, 그리고 장기하와 얼굴들 같은 밴드를 통해 그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솔약국집...’, 딸 부잣집에서 아들 부잣집 시대로

‘딸 부잣집’은 여전히 가족 드라마의 단골 소재. 호평을 받고 종영한 김수현 작가의 ‘엄마가 뿔났다’에서도, 현재 방영되고 있는 ‘사랑은 아무나 하나’에서도 딸 부잣집은 여전히 맹위를 떨친다. 이들 딸 부잣집 드라마에 역시 단골로 등장하는 캐릭터가 부잣집 아들이다. 이 서로 다른 계층의 집안이 얽히는 이야기는 신데렐라 모티브를 자극한다. 즉 ‘딸 부잣집 드라마’란 ‘부유하지는 않지만 딸들이 많은(그래서 그게 재산인!)’ 가족의 딸 시집보내기가 메인이 되는 드라마가 된다.

하지만 최근 새롭게 시작한 주말극 ‘솔약국집 아들들’에는 이 드라마가 주목하는 남성과 여성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아들 부잣집인 솔약국집 네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인 이 드라마에는 집안 좋고 잘 나가는 부잣집 엄친아들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대신 어머니인 배옥희(윤미라)의 속만 푹푹 썩이는 아들들만 가득하다. 이름과 잘 어울리는 이 네 아들들은 모두 결혼 문제에 있어 하자(?)가 있어 보인다.

진풍(손현주)은 약사지만 나이 사십의 혼기를 놓쳐버린(?) 맏아들. 사람으로만 보면 진국이 우러나는 인물이지만 외모나 나이로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는 사내다. 둘째 대풍(이필모)은 소아과 의사로 이 집안에서 가장 잘 나가는 아들이다. 큰 소리 뻥뻥치는 스타일이지만 실속은 없어 보인다. 셋째 선풍(한상진)은 방송사 기자지만 착해 빠지기만 했지 어딘지 현실적으로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어수룩한 인물이고, 넷째 미풍(지창욱)은 재수생으로 성별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여성 취향적인 인물이다.

요즘 뜬다는 남데렐라(남자 신데렐라) 이야기가 중심에 있지만 그것은 경제적인 의미, 즉 신분상승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재수생인 넷째를 제외하고는 모두 약사에 의사에 기자인 그럴 듯한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남데렐라란 경제적 의미보다는, 이 드라마가 내세우는 결혼이라는 지상과제를 해결해주는 여성들을 만난다는 의미가 강하다.

바로 이 부분은 이 드라마가 이제는 달라진 남녀 관계를 드러내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인 맥락을 띄지는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즉 이 드라마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다른 위치에 선 남녀를 다룬다기보다는, 그저 결혼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달라진 남녀 관계를 다루고 있다. 물론 현실적인 결혼이 어찌 계층적인 문제를 외면할 수 있겠냐마는 이 드라마는 기존 여러 딸 부잣집 드라마에서 극적으로 대비되던 빈부의 문제를 의도적으로 뒤편으로 밀어내고 대신 성향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 부분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이 드라마가 아들 부잣집을 다루면서도 여전히 남성 중심적 사고관을 벗지 않고 있다(남자들은 여전히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존재로 그려진다)는 반증일 수도 있고, 혹은 남녀 간의 사랑, 결혼에 있어서 이제 그런 경제적인 차이의 문제는 촌스러운 어떤 것이 되었다는 현실적인 반증일 수도 있다. 그것이 어느 것이든 분명한 것은 이 드라마의 이러한 위치가 보다 폭넓은 시청층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트콤에 가까운 코믹한 터치는 이 드라마에 대한 진지한 접근보다는 부담 없이 웃을 수 있는 지점을 제공해준다.

딸 부잣집을 뒤집어 아들 부잣집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드라마를 가지고 섣불리 뒤집혀진 남녀 관계를 얘기하기는 어렵다. 이 드라마는 사회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한 남성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성들이 개인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결혼에서도 성공(물론 그것이 여성들에 의한 구원일지라도)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이 드라마를 통해 핏줄로 세습되는 부잣집 아들의 식상한 이야기는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것이 부잣집 아들 이야기보다 아들 부잣집 이야기가 좋은 이유다.

음악, 토크, 농담까지, ‘유희열의 스케치북’

빵빵 터진다. 늦은 밤이지만, 음악 프로그램이지만, 이 작고 메마른 남자가 한 마디씩 할 때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어쩔 수가 없다. 라디오를 통해 재치 있는 언변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공개무대에서 저처럼 자연스럽기도 쉽지 않을 듯싶다. ‘이하나의 페퍼민트’는 어눌하고 어색한 이하나의 진행이 오히려 풋풋한 맛을 주었지만,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음악이면 음악, 토크면 토크, 순발력 넘치는 농담까지 능수능란한 유희열의 진행에 편안한 맛이 느껴진다.

진행자에 따라서 이다지도 스타일과 색깔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또한 새삼스럽다. ‘이소라의 프로포즈’가 조분조분함이었다면, ‘윤도현의 러브레터’는 그 치기에 가까운 활기참이었고, ‘이하나의 페퍼민트’는 풋풋한 생기발랄함이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아직 그 빈 도화지가 어떤 느낌의 그림을 그려낼 것인지 확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첫 인상으로 감히 예측해본다면 그건 장난기 가득한 어린아이 같은 느낌 같은 게 아닐까.

초대된 이승환 앞에서는 한 때는 자신처럼 “딱 보면 초등학교 6학년 같았지만”, 지금은 운동을 해서 “가슴근육이 거의 저희 큰 고모” 같아졌다고 너스레를 떨고, 이소라 앞에서는 남자처럼 짧게 자른 머리를 갖고 장난을 친다. 언니네 이발관 앞에서는 그 밴드의 탄생 과정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건네주고, 김장훈과는 이 프로그램을 두고 어떻게 해나갈지 고민했던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의 토크 스타일은 게스트와의 적절한 대결구도를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분히 도발적인 이야기들이 상대방을 자극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이 그렇게 불편하게 느껴지질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게스트들과의 친밀한 유대가 토크 속에 묻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때론 형처럼 때론 누나처럼 친하기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마음껏 장난을 쳐도 그것이 오히려 친밀감의 표현으로 느껴진다.

프로그램은 이전 프로그램들에 비해 토크가 늘었고 게스트의 수가 줄었다. ‘이하나의 페퍼민트’ 마지막 회에 양희은, 에픽하이, 아마도 이자람 밴드, 동물원, 장기하와 얼굴들, 요조, 짙은, 국카스텐, 검정치마, 킹스턴루디스카가 게스트로 출연했던 반면, 이 프로그램의 첫 방송에는 이승환, 이소라, 언니네 이발관, 김장훈 이렇게 게스트가 단출해졌다. 혹자는 이것을 가지고 음악 프로그램에 음악이 줄었다고 불평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크가 형식적인 소개 정도가 아니라, 게스트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그네들의 캐릭터와 사연을 덧붙인다는 점에서 줄어든 게스트에 대한 집중도는 더 높아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희열은 프로그램 말미에 김장훈과 했던 고민, 즉 이 코너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들려주었다. 그것은 “다 필요 없다. 음악적으로 가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관객들과 다짐하듯 “갈 데까지 가보자”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가 말했듯 이 무대는 “좋은 음악이 있는 곳”이고 처음 그가 “가수 데뷔했을 때”의 “꿈의 무대”였듯이 앞으로도 “가수의 꿈을 꾸는 분들에게 꿈의 무대”로 남을 것이 틀림없다. 토크와 유머를 갖고 온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그 빈 도화지에 그 꿈의 무대를 그려내기를 기대해본다.

‘카인과 아벨’, ‘미워도 다시 한번’, 가족의 힘 여전

종영한 수목극 ‘카인과 아벨’과 ‘미워도 다시 한번’은 장르적으로 보면 상이한 드라마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놓고 보면 그 구조는 비슷하다. 두 드라마는 모두 그 중심에 뒤틀어진 가족사가 있으며, 그 가족 내에서 사랑 받기 위해 대결구도를 벌이는 인물들이 있고, 파국으로 치닫는 가족이 있으며, 결말에 이르러 본래 제자리를 찾아가는 가족이 있다. 결국 이 두 드라마는 스타일과 장르가 달랐지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같았던 셈이다. 그것은 우리 드라마의 영원한 주제, 가족이었다.

‘카인과 아벨’의 엇갈린 가족사는 형이 동생을 죽이려 하고, 어머니(물론 친어머니는 아니지만)가 자식을 죽이려 하며, 형이 동생의 여자를 뺏으려 하고, 어머니가 자식의 유산을 가로채려하는 파국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부모 대에서부터 시작된 연원이 자식대로까지 반복되는 이 불운의 가족사는 저 제목이 말해주듯 꽤 오랜 전통(?)을 가진 본원적인 스토리 라인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카인과 아벨’이라는 드라마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그 스토리가 가진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기 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종영에 이르러 이 드라마가 전하는 메시지를 정리하면 ‘사랑 받기를 갈구하는 자들을 구원해주는 행복했던 기억’ 정도가 될 것이다. 이 드라마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나혜주(김해숙)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이선우가 결국 비뚤어지게 사랑을 갈구하는 이야기이고, 그 과정에서 사랑을 독차지해온 것처럼 보인 이초인(소지섭)이 사지에 내몰렸다가 살아 돌아와 모든 것을 원상태로 돌리는 이야기다. 이초인의 마지막 진술로 보자면 이런 아픔들을 구원해주는 것은 누구나 하나쯤은 있는 ‘행복했던 기억’이 된다.

그간 접어두었던 기억의 문제는 이렇게 마지막 부분에서 등장하면서 다소 성급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이렇게 제시되는 메시지는 사실 이 드라마가 가진 힘을 설명해주기에는 역부족이다. 메시지를 떼놓고 보면 이 드라마가 보여준 것은 파괴 직전까지 내몰리는 한 불행한 가족사라고 볼 수 있다. 해체되는 가족에 대한 집착, 가족 구성원으로 편입되려는 안간힘 같은 것이 이 드라마의 진짜 힘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핏줄과 가족에 대한 드라마의 집착은 왜 우리네 드라마에 파탄난 가족들이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워도 다시 한번’은 우리네 드라마의 전형적인 핏줄 정서를 보여주는 드라마다. 1968년 정소영 감독이 동명의 원작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파국적인 가족이야기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스타일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반복된다. 그것은 이 드라마의 복잡한 가계도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명진그룹 회장인 한명인(최명길)은 남편 이정훈(박상원)사이에 아들 이민수(정겨운)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민수는 이정훈의 친아들이 아니고 한명인의 첫사랑의 소산이며 한편 이정훈과 내연관계에 있는 은혜정(전인화)은 그와의 사이에 딸 수진(한예인)을 두고 있는데, 사실은 숨겨진 딸 최윤희(박예진)가 하나 더 있다.

이처럼 이 드라마는 한 명씩 과거에 숨겨져 있던 가족과 관련된 인물들을 하나씩 불러들임으로써 극의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그 첫 번째는 이정훈의 숨겨진 내연녀 은혜정이고 두 번째는 죽은 줄 알았던 한명인의 첫사랑이며, 세 번째는 은혜정의 숨겨진 딸 최윤희다. 실로 제목처럼 미워도 다시 한번 끄집어내 뒤틀렸던 가족사를 제자리로 돌리려는 욕망이 이 드라마가 굴러가는 진짜 힘이다. 이 과정에서 과거로부터 소환된 인물들은 끊임없이 현재 유지되어 있는 가족을 뒤흔든다. 과거와 현재의 충돌, 그로 인해 위기에 처하는 가족, 그리고 어떤 화해(어떻게든 되어야만 하는). 이것은 고전적인 가족극의 전형이다.

종영하는 두 드라마는 모두 공교롭게도 이처럼 뒤틀린 가족의 제자리 찾기를 보여준다. 그런데 결말에 이르러 이들 드라마들이 모두 어딘지 급하게 마무리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어쩌면 이들 드라마들의 힘이 끊임없이 파괴되어가는 가족의 모습(그래서 그걸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반대급부의 힘까지) 그 자체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상 이들 드라마가 주목한 것은 그 끊임없이 파탄 일로를 달리는 가족들의 대결과정 그 자체이지, 어떤 제자리를 찾아가는 결말이나 메시지는 아니었던 셈이다. 어쨌든 우리에게 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끈끈함은 이번 종영하는 이 두 드라마를 통해서도 입증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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