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의사에서 속물 의사로, <용팔이>가 그리는 세상

 

역시 주원은 의사가운이 잘 어울린다. <굿닥터>에서 자폐를 가진 서번트 증후군의 시온 역할에서 주원은 마음까지 보듬어주는 착한 의사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 착한 의사라는 존재는 그래서 거꾸로 병원 조직에까지 스며든 권력 시스템을 에둘러 비판하는 인물로 부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 의사가운을 입은 <용팔이>에서 주원이 연기하는 김태현은 이런 착한 의사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돈을 준다면 어디든 달려가는 속물의사다.

 


'용팔이(사진출처:SBS)'

용한 돌팔이’. 이것이 조폭들 사이에서 김태현이 용팔이로 불리는 이유다. 칼부림과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는 조폭 세계. 하지만 병원은 갈 수 없는 그들을 위해 용팔이는 어디든 왕진을 간다. 조폭들도 고귀한 생명이니 하는 의사 윤리의식 따위는 거기에 없다. 용팔이가 그 위험한 왕진을 감행하는 이유는 하나, 바로 돈이다.

 

일반외과 레지던트 3년차지만 대단한 수술 실력을 가진 덕분에 병원 과장들의 구원투수로 불려 다닌다. 그들이 잘못 해놓은 수술 때문에 죽게 생긴 환자들을 수두룩 살려내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인 의학드라마에서 보던 그런 존경어린 시선이나 선배 의사들의 칭찬 따위는 없다. 그는 오로지 과장들의 승률을 높여주는 구원투수로서만 취급된다. 김태현 역시 그런 걸 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대신 그는 VIP 환자 가족으로부터 사례를 받는 걸 당연시 한다.

 

의사라고 하면 생명을 살리는 직업으로서 그려지기 마련인 의학드라마에서 용팔이는 그 모든 행위를 거래관계로 바꿔놓는다. 돈이 오고가면 어디든 왕진을 가고, 누군가를 살려내면 거기에 합당한 돈을 받는다. 그걸 갖고 의사의 윤리 운운하는 과장에게 그는 당당하다. 과장 역시 VIP병동에서는 사례비를 받기 때문이다.

 

그토록 반복되어온 의학드라마라고 해도 <용팔이>가 그리는 의사는 다르게 다가온다. <용팔이>는 의사를 성인으로도, 존경받는 인물로도, 그렇다고 오로지 병원 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야심가로도 그러지 않는다. 용팔이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그래서 거래다. 제대로 된 물적 대가를 받는 것으로 꿈이나 이상 혹은 포부를 접으며 살아가는 인물이 바로 용팔이다.

 

물론 의사라는 특정한 직업인으로서 그려지고 있지만 용팔이의 이러한 삶의 태도는 여러모로 현재의 청춘들을 그대로 닮아있다. 이미 태생부터 결정되는 삶의 양태는 결코 노력한다고 해서 넘어설 수 없는 벽이 된 지 오래다. 제 아무리 용쓰고 노력해도 가난하게 태어난 이들이 가난을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 우리네 사회의 불행한 구조이지 않은가. 그러니 포기하고 현실적이고 때로는 속물적이라고 부르는 삶을 사는 것이 뭐가 잘못됐단 말인가.

 

물론 용팔이의 그런 속물적인 삶의 선택 이면에는 평생 투석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자신의 여동생이 있다. 그 만만찮은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돈을 벌어야 한다. 아니 그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조차 죽을 수도 없는 인물이다. 자신의 죽음은 여동생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속물화된 세상 속에서도 그 순수함을 지켜내던 <굿닥터>가 이제는 대놓고 속물을 선언하고 나선 <용팔이>로 돌아왔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속물의사 용팔이가 부정적인 인물이 아니라 꽤 공감 가는 인물로서 받아들여지는 건 그 짧은 몇 년 사이 우리네 현실이 얼마나 더 절망적인 청춘들을 낳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용팔이>는 그래서 의사가운처럼 잘 차려입은 옷으로 그럴 듯하게 꾸며지고 있지만 사실은 위선 가득한 세상에 일침을 날리는 존재로 다가온다.



<닥터 이방인>, 권력에 미친 남한, 막연한 괴물 북한

 

이 드라마 참 낯설다. <닥터 이방인>이라는 제목이 주는 복합 장르적 뉘앙스 때문만은 아니다. 제목은 의학드라마와 남북 관계를 엮은 스파이 장르물이 혼재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장르의 혼재는 이제 대중들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닥터 이방인(사진출처:SBS)'

문제는 이 드라마가 드러내고 있는 남한과 북한에 대한 낯선 시선이다. <닥터 이방인>은 명우대 병원이라는 공간을 폐쇄적으로 다룬다. 드라마는 이 명우대 병원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병원이 수상하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던 병원과 사뭇 다르고, 또 의학드라마가 보여주던 병원과도 다르다.

 

어찌된 일인지 이 병원에서 환자들은 총리(사실은 대통령)를 수술할 팀을 뽑기 위한 테스트용으로 수술대 위에 눕혀진다. 박훈(이종석)이 이끄는 팀과 한재준(박해진)이 이끄는 팀은 끝없는 수술대결을 벌인다. 총리 수술 팀을 뽑기 위한 그 수술에서 환자는 일종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환자 가족들의 반발과 고마움이 표현되지만 그것 역시 큰 틀에서 보면 수술대결의 연장처럼 보여진다.

 

물론 이러한 수술대결이 과거 의학드라마에서 없었던 건 아니다. <하얀거탑>에서 장준혁(김명민)이라는 외과의사는 마치 예술작업을 하듯 수술을 한다. 또 외국에서 온 노민국(차인표)과 수술대결을 벌이기도 한다. 이 미학화된 수술은 인간을 예술의 소재로 만들어내는 불편함을 연출한다. 결국 <하얀거탑>의 이야기는 이 욕망덩어리의 문제적 인간 장준혁의 몰락을 다루었다.

 

하지만 <닥터 이방인>에서 수술 대결을 벌이는 박훈과 한재준의 이야기가 이러한 문제적 인간을 다룰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 비인간적인 수술대결에 대해 북에서 온 의사 박훈이 수술대결에 대한 불편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드라마는 메시지를 담는다. 즉 돈과 권력욕에 눈먼 남한에 대한 문제의식을 박훈이라는 이방인의 시선으로 그려낸다는 점이다. 여기서 명우대 병원은 우리사회를 상징하는 폐쇄적 공간이 된다.

 

총리가 대통령을 혼수상태에 빠뜨리고 국정을 제 손아귀에 쥐기 위해 북한과 손잡고 특별한 수술 팀을 꾸린다는 <닥터 이방인>의 설정은 결코 현실적이지 않다. 또한 그런 수술팀을 꾸리기 위해 한 병원에서 환자를 대상으로 수술 대결을 벌이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즉 이 드라마는 본격 의학드라마가 아니다. 다만 명우대 병원이라는 공간을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끄집어내는 사회극에 가깝다.

 

이처럼 <닥터 이방인>이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극단적이다. 사람을 살리는 병원이 마치 실험실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고 권력을 위해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목적을 담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자본과 권력에 경도된 우리 사회의 문제는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지만 그것을 과도하게 극화해 병원 수술대마저 경합의 장으로 만들어버리는 이야기는 낯설음을 넘어서 불편함을 준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가 다루는 북한에 대한 이미지는 어떨까. 김대중 정권 이후에 <쉬리><공동경비구역 JSA>, <웰컴 투 동막골> 같은 남북한의 화해를 다루는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최근 들어 북한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막연한 살상용 무기처럼 그려지고 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용의자> 같은 영화를 보라. 남파 공작원이나 탈북자는 무시무시한 살인기술을 가진 존재들로 다뤄진다.

 

흥미로운 건 이 살인기술자(?)들이 남한에서 마치 슈퍼히어로처럼 활약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남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막연한 두려움의 존재로서의 북한 이미지를 가져와 해소시키려는 욕망이 만들어낸 것이다. 남한으로 들어온 이 북한의 슈퍼히어로들은 우리 사회의 문제와 비리들을 해결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이것은 <닥터 이방인>도 마찬가지다. 박훈이라는 이방인은 초인적인 외과수술 능력으로 우리사회의 병폐들에 메스를 대는 슈퍼히어로다.

 

<닥터 이방인>이 담아내는 남북한의 이미지는 양측이 모두 낯설다. 남한은 권력에 미쳐 병원의 환자들마저 도구화하고 수단화하는 비정한 공간이고, 북한은 막연한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괴물과 슈퍼히어로를 양산하는 공간이다. 물론 이 극화된 이야기가 남북으로 갈라진 불안한 우리 사회가 가진 두려움과 권력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담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극화되다 보면 그 자체로 등장인물조차 메시지를 위한 도구가 되는 느낌을 주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닥터 이방인>의 낯설음은 그 이야기가 비현실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과도한 극화가 인물들을 도구화하는 듯한 불편함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마치 박훈이 이건 수술대결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강변하면서도 결국은 그 수술대결의 주인공이 되는 것처럼.

<마의>, 김혜선의 과잉 연기까지 나오는 이유

 

‘마의가 인의가 된다’는 그 한 줄의 문구만으로도 <마의>는 꽤 괜찮은 기획이었다고 여겨진다. 거기에는 성장드라마가 있고 사극에 의학드라마가 겹쳐져 있으니 그 극성은 최고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의학드라마는 사람을 살리느냐 살리지 못하느냐는 상황으로 극적 갈등을 만들지만, 그것 때문에 의사가 목숨을 거는 일은 거의 없다.

 

'마의'(사진출처:MBC)

하지만 <마의>에서 백광현(조승우)은 숙휘공주(김소은)의 두창 때문에 목에 생긴 물집을 터트리기 위해 마침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걸어야 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생명까지 걸어야 하는 것. 이것이 <마의>가 가진 사극과 의학드라마의 퓨전에서 생겨나는 극성이다.

 

하지만 이런 좋은 기획의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의>는 그다지 극성이 높여지지 않고 있다. 이유는 주인공 백광현이 사실상 무적의 캐릭터가 되었기 때문이다. 비슷비슷한 미션과 해결과정이 반복되면서 시청자들은 이미 백광현은 어떤 식으로든 저 상황을 이겨낼 거라는 것이 학습되어버렸다.

 

게다가 그에게는 어찌 된 일인지 그를 도우려는 이들이 줄을 선다. 숙휘공주는 공주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를 연모하며, 서은서(조보아)는 백광현의 적인 정성조(김창완)의 며느리지만 그의 오빠(윤희석)와 함께 역시 그를 돕는다. 그의 연인인 강지녕(이요원)은 물론이고 삼각관계가 될 수 있었던 이성하(이상우)까지 그를 돕고, 장인주(유선), 고주만(이순재), 사암도인(주진모), 추기배(이희도), 오장박(맹상훈), 자봉(안상태), 소가영(엄현경) 등등 수많은 인물들이 백광현의 편에 서 있다. 심지어 현종(한상진)까지도. 이렇게 보면 백광현은 신분사회에 앞길이 막혀버린 청년이라기보다는 엄청난 인맥을 가진 능력자처럼 보인다. 이러니 백광현에게 어떤 긴박한 상황이 생겨도 긴장감이 생기기가 어렵다.

 

이런 백광현이라는 무적의 캐릭터의 문제는 반대편에 서 있는 악역 캐릭터들마저 뒤흔든다. 이명환(손창민)이야말로 이 사극의 대표악역이라고 할 수 있지만 거의 무소불위의 능력을 가진 백광현 앞에서 이제는 별 힘도 쓰지 못하는 캐릭터로 전락해버렸다. 최형욱(윤진호)이라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사람을 살리는 칼이 아니라 죽이는 칼도 서슴없이 쓰는 극악의 캐릭터를 세우자 이명환은 순식간에 보조 캐릭터 같이 되어버렸다. 물론 최형욱 역시 무적의 백광현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 서서히 보여지면서 그 긴장감도 사라져버렸다.

 

갑자기 인선왕후 역할을 하고 있는 김혜선의 과잉 연기가 나오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적이 사라져버린 극에서 어떻게든 극적 갈등을 만들어내려는 안간힘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의술로서 백광현을 당해낼 자가 사라져버린 상황에, 그를 저지할 수 있는 것은 신분사회가 가진 차별과 권력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 부릅뜨고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극적 긴장감이 올라갈 리는 없다. 다만 과장 연기가 드러날 뿐이다.

 

<마의>가 그 좋은 기획과 의도를 갖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은 그 극적 긴장감을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 백광현이라는 주인공 중심의 단순한 선악 대결이 가져온 결과다. 그런데 무적의 주인공 캐릭터가 가진 문제는 거기서 머물지 않는다. 그 적수들 캐릭터마저 무색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캐릭터의 문제는 자칫 연기자에게까지 그 불똥이 튈 수 있다. 또 이런 능력자 캐릭터는 애초에 아무 것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대중들의 동정과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백광현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매력도 떨어뜨린다. 그 좋은 시작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마의>는 이런 뻔한 드라마가 되어버렸을까.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사극과 의드의 만남, 그 진화의 계보학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함부로 훼손할 수 없다는 <효경>에 실린 공자의 말은 동양의학에서 외과의 영역을 위축시켰다. 칼로 째고 바늘로 꿰매는 외과술은 이 효를 근간으로 하는 동양의 가치관과 부딪치면서 좀체 빛을 보지 못했던 것. 하지만 드라마는 사정이 조금 다른 것 같다. 사극과 의학드라마라는 두 장르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강력한 극성 때문에, 최근 사극은 과거에는 좀체 존재하지 않았던 외과의에 주목하고 있다.

 

'마의'(사진출처:MBC)

<마의>에서 백광현(조승우)은 뼈가 썪어 가는 부골저를 치료하기 위해 스승인 고주만(이순재)의 뇌수술을 감행했다. 머리에 구멍을 뚫고 그 병변에 직접 약재를 투입했던 것. 하지만 파상풍 부작용에 의해 스승이 죽게 되자 도망자 신세가 되어 중국까지 흘러들어간 백광현은 다시 그 부골저라는 병과 마주하게 된다. 그는 부골저를 앓는 청나라 황비를 고쳐 조선으로 돌아오려고 하지만 스승을 죽게 했다는 트라우마는 그를 괴롭힌다.

 

이처럼 <마의>는 뼈에 구멍을 내고 살갗을 갈라 병변을 제거해내는 외과술을 보여준다. 조선시대라는 배경에 외과술은 그 자체로 볼거리를 제공한다. 즉 태반이 뒤틀어져 옆구리로 비어져 나온 아기를 수술로 받아내는 장면이나, 유방에 종양이 생긴 처자를 외과술로 치료하는 장면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외과술은 단지 볼거리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당대 신분사회 체계 속에서 외과를 천대하는 시선과의 싸움은 그 자체로 현 시대적 의미를 담아내기에 용이하기도 하다.

 

백광현이 인의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마의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말을 고치기 때문에 외과술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병을 바라보는 시선도 양반 상놈의 구분 없고 심지어 동물과 인간의 구분이 없는 바로 그 똑같은 몸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인식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마의>에서 백광현이 대단한 것은 그 놀라운 손기술이 아니라 신분과 사회와 풍습의 제약 속에서도 인간의 몸을 똑같은 생명으로 바라보는 그 시선일 것이다.

 

바로 이 생명에 대한 현대적인 가치는 과거의 신분제 같은 가치와 충돌을 일으키면서 의미 있는 갈등들을 만들어낸다. 한 촉망받는 인물의 성장이 태생적으로 차단되는 조선 사회의 경직성은 이 시대의 청춘들이 겪고 있는 ‘끊겨진 성장의 사다리’를 환기시킨다. 바로 이 천한 태생 때문에 심지어 생명을 살려낸 외과술조차 천시하는 세상이다. 사람 몸에 칼질을 하는 것은 ‘백정’이나 하는 짓이라 치부하며 오히려 그 앞길을 막아서는 행위는, 작금의 실력이 아닌 태생으로 미래가 결정되는 우리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제중원>에서 그 주인공인 황정(박용우)이 백정이었다는 사실은 조선에서의 외과술을 소재로 하는 사극이 어떤 동일한 시각을 갖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구한말 서양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제중원’ 같은 서양식 의료기관을 세우기 시작하던 그 혼돈의 시기에 황정은 소 잡는 칼을 사람 살리는 칼로 변모시킴으로서 근대적인 인간을 탄생시킨다. <제중원>에서 우두백신을 만들어 예방접종을 하는 장면은 그래서 근대적 사고방식, 즉 과학적 사고방식을 조선사회에 접종하는 장면처럼 그려진다. 어느 정도 생채기가 남겠지만 그것은 결국 합리적인 근대적 이성을 형성해내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제중원>은 사극과 의학드라마의 하이브리드를 시도한 공적이 컸지만 초반의 신선한 발상과 시도가 드라마의 과정의 재미로는 이어지지 못한 점이 있다. 후반부로 와서는 본래 하려던 이야기에서 자꾸만 멜로로 주저앉는 안타까움을 보였던 것. 하지만 이 하이브리드의 가능성은 이후 사극과 의학드라마의 접목을 하나의 트렌드로 만들었다. <닥터 진>과 <신의>는 이 하이브리드에 대한 욕망이 SF와 판타지까지 나간 경우다.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했던 <닥터 진>은 조선으로 갑자기 떨어지게 된 진혁(송승헌)이 생명을 구해내려는 의사 본연의 마음과 그로 인해 뒤죽박죽 되어버리는 역사와의 대결구도를 흥미롭게 그려냈다. 반면 <신의>는 타임 터널을 통해 고려말로 들어가게 된 성형외과의 유은수(김희선)와 최영(이민호)의 만남을 다뤘지만 본격적인 의학드라마와 사극의 접목이라기보다는 멜로에 머무는 한계를 보였다. 어쨌든 두 작품은 SF나 판타지라는 장르적 장치를 등에 업고 있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역사극이나 외과술에 대한 리얼한 접근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런 의학드라마와 사극의 하이브리드를 보여준 작품들의 계보를 통해 바라보면 <마의>가 가진 가치를 새삼 느낄 수 있다. <마의>는 이 하이브리드를 마의라는 당대의 직업적 성격에서부터 끄집어내 자연스럽게 조선사회와 외과술을 연결시켜내면서도 동시에 그 이병훈표 사극 특유의 미션 구조를 통해 대중성까지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광현의 흥미로운 성장과정을 자연스럽게 보다보면 우리는 거기서 조선사회와 비견되는 우리 현재의 사회를 바라볼 수 있고, 현대적 가치가 더 돋보이는 생명에 대한 존엄을 발견할 수 있다. 사극이 의학드라마와 만나 생겨난 진화는 그래서 대중성과 진지함을 모두 잃지 않는 <마의>에 의해 어쩌면 꽃을 피우고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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