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뚫고...', 웃음을 넘어 공감까지 하이킥!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이순재는 김자옥을 위한 이벤트로 3천만 원 가까운 엄청난 비용을 쓰고는 그것을 벌충하기 위해 가족들을 모아놓고 비상시국선언을 한다.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절반으로 줄이라는 것. 그러자 그 집에 얹혀사는 세경과 신애는 쫓겨나는 건 아닌가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세경은 스스로 월 60만원 받던 것을 깎겠다고까지 말하며 앞장서서 비용절감에 나선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이순재는 홈쇼핑으로 김자옥을 위해 고가의 코트를 선물한다.

이 때 이순재의 양심이 하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네가 저지른 일로 왜 가족들이 고생을 해야 하냐. 너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이 양심의 말은 그의 행동과 비교되면서 보는 이들을 웃게 만들지만, 이 전체 이야기는 절대 웃지만은 못할 뉘앙스를 갖고 있다. 이 시트콤 속에서의 가족은 한 나라로도 읽히고, 그 가계살림의 파탄은 나라경제의 파탄으로도 읽힌다. 이순재의 생각 없는 낭비가 가족들의 쪼들림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일은 엄한 데서 저질렀지만 늘 국민들이 고통분담을 해야하는 상황을 떠올리게 하고, 그래도 열심히 절약하려는 세경의 모습은 눈물겨운 서민들의 건강함을 떠올리게 한다.

'지붕 뚫고 하이킥'은 이전에도 이 가족과 이웃의 이야기를 통해 나라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순재의 공언으로 시작된 '만 마리 학접기 사건'이다. 김자옥에게 접지도 않는 학을 접고 있다고 말하고 만 마리를 접어 선사하겠다고 공언한 이순재는 그 말을 책임지려고 정보석에게 회사도 나오지 말고 학을 접으라고 시킨다. 정보석은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일을 아르바이트를 고용해 하기 시작하는데, 그 파급효과가 미국, 인도 등 점점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나중에는 개성공단에서 학을 접는 상황까지 커져나간다는 이야기다.

학을 접기 위해 전 세계인이 들썩거린다는 그 이야기가 웃음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네 경제가 어떻게 굴러가는가를 에둘러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가진 자들에게는 별거 아닌 일로 비롯된 소비가 전체 경제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 물론 학 한 마리 접는데 백 원씩 받기 위해 여기저기서 달려드는 아르바이트생들의 이야기에는 씁쓸한 구석도 있다. 거기에서 청년들의 취업문제가 떠오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런 경제 불황 속에서 사회가 웃음을 잃어가는 것은 당연지사. '지붕 뚫고 하이킥'이 가볍게 던지는 웃음 한 방에 잠시 동안 시름을 잊게 되다가도, 그 시대를 공감하는 이야기가 짠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웃음을 넘어 공감까지 갖게 되는 것. 이것은 '지붕 뚫고 하이킥'의 웃음 코드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지붕 뚫고 하이킥'은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그것은 시트콤의 본분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들 어려운 시국에 지나치게 가벼운 것도 그다지 좋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지붕 뚫고 하이킥'이 서 있는 지점은 실로 절묘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트콤은 웃음은 물론이고 공감을 통한 흐뭇함이나 감동까지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여느 심각한 드라마도 하지 못하는 것을 이 시트콤은 제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미실의 죽음에서 '모래시계' 태수가 떠오르는 이유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이 아름다운 최후를 맞았다. 이제 드라마 속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인물이지만, 미실이라는 캐릭터는 우리네 드라마史에 남을 족적을 남겼다. 먼저 미실이라는 캐릭터는 사극 속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드라마 전체에 힘을 부여하고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힘을 지닌 캐릭터였다. '선덕여왕'의 시작이 덕만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미실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미실이라는 강력한 여성 카리스마를 세워두었기 때문에 그 반대급부로서 덕만(이요원)과 유신(엄태웅), 비담(김남길), 춘추(유승호) 등의 캐릭터가 세워질 수 있었다. 드라마 속에서 자결한 미실 앞에서 덕만이 하는 말, "당신이 없었다면 자신도 있을 수 없었다"는 그 말은 캐릭터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바로 덕만이 술회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미실은 단순히 악역으로 치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때론 강력한 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덕만의 멘토 역할을 해주고,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면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미실은 악역이라기보다는 시대를 잘못 만난 안티 히어로라고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이상적인 덕만과 상반되게 현실 정치 감각을 가진 인물이 미실이다. 덕만이 곧잘 하는 말, "미실이 하는 방식으로 해야겠다"는 말은 이 인물이 가진 뛰어난 능력을 말해준다.

미실은 또한 여성으로서의 카리스마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캐릭터이기도 하다. 미실은 이 사극 속에서 움직임이 거의 없는 캐릭터다. 그녀는 칼을 휘두르거나 전쟁에서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저 한 자리에 앉아 판세를 읽고 거기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정치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를 갖춘 인물. 칼의 힘보다 더 강력한 말의 힘만으로 상대방을 오금을 저리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이 미실이다.

이 정적인 상태에서 온전히 카리스마를 보여야 하는 미실이라는 캐릭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고현정이라는 연기자다.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틀고, 눈꼬리를 조금 올리는 것만으로 미실이 가진 힘을 온전히 표현해냈다. 즉 미실이라는 캐릭터는 고현정이라는 연기자에게도 큰 의미가 되는 캐릭터라는 점이다. 고현정은 청순한 이미지에서 탈피해 털털한 이미지로의 변신을 꾀해왔고, 이번 작품을 통해 요염하면서도 악마적이고, 카리스마가 넘치면서도 비극적인 복잡한 캐릭터를 소화함으로써 연기 스펙트럼을 더욱 넓힐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빛나는 캐릭터의 하차가 아쉽기 때문일까. 미실의 죽음 앞에 '선덕여왕'의 인물들은 저마다 예의를 표하는 모습을 보였다. 1995년 '모래시계'에서 고현정은 청순한 모습으로 최민수와 연기 호흡을 맞추며 주목을 끌었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 고현정에서 당시 최민수가 보여주었던 카리스마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실의 최후에, 드라마史에 길이 남게 된 모래시계' 태수(최민수)의 죽음이 연상되는 것은, 미실이라는 캐릭터가 일궈낸 여성 카리스마의 절정과 그것을 연기한 고현정의 변신이 놀랍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한 시대는 흘렀고, 카리스마 역시 남성에서 여성으로 옮겨져 왔다. 미실은 바로 그 지점을 표상하듯 서 있는 캐릭터다.

이순재에서 해리까지, 망가질수록 빛나는 그들

연기자가 가장 빛나는 지점은 언제일까. 그것은 연기자 자신이 아닌 캐릭터에 몰두할 때이다. 그래서일까. 연기자들이 여지없이 망가지는 바로 그 순간, 그들이 가장 빛나게 되는 것은. ‘지붕 뚫고 하이킥’은 시트콤이 가진 특성상 연기자들의 망가짐이 빈번할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시트콤 같은 코믹 장르가 가진 웃음은 기존 이미지의 전복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혀 그러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 정반대의 행동을 했을 때, 시트콤은 드디어 큰 웃음을 주게 된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이 ‘망가짐의 미학’을 솔선수범해 보여주는 인물은 이순재다. 칠순의 나이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멜로 연기에 어찌 창피함이 없었을까. 하지만 그는 김자옥을 위한 이벤트를 하기 위해 ‘네버 엔딩 스토리’를 열창하다 쓰러지기도 하고, 연실 북북 나오는 방귀를 그녀 앞에서 참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기도 한다. 그의 연인 김자옥과 원어민 강사인 줄리엔이 가깝게 지내는 것에 대해 질투를 할 때는 심지어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망가짐의 끝에 그러나 이순재가 얻은 것은 역시 진정한 연기자라는 호평이다.

이순재의 아낌없는 망가짐의 솔선수범, 그 결과일까. ‘지붕 뚫고 하이킥’의 다른 연기자들도 자연스럽게 그 미학(?) 속으로 들어간다. 황정음은 술에 떡이 돼 해변에 쓰러져 잠든 ‘떡실신녀’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준혁에게 누나 소리를 듣기 위해 남장을 하고 연기를 하는 ‘황정남’에서 뻥 터졌으며, 술에 취해 세경과 함께 웃음과 눈물의 이중주를 보여줌으로써 연기자로서의 확고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한없이 망가지지만 여전히 귀엽고 발랄해 보이는 건 그녀만의 매력. ‘지붕 뚫고 하이킥’을 통해 황정음은 연기자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굴욕 연기에도 명품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정보석의 것이다. 김병욱 PD가 늘 시트콤을 통해 그려왔던 굴욕당하는 가장의 모습은 ‘순풍산부인과’와 ‘똑바로 살아라’의 박영규에서부터 ‘거침없이 하이킥’의 정준하를 거쳐 ‘지붕 뚫고 하이킥’의 정보석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늘 구박을 받는 존재로서 가부장제의 해체가 주는 통쾌한 웃음은 물론이고, 현 시대가 그려내는 가장들의 쓸쓸함까지 잡아내는 존재들이었다. 정보석은 완벽해 보이는 외관(외모는 물론 지위까지)과는 상반되게 덜떨어진 모습을 진지하게 보여줌으로써 명품 굴욕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꼬마 악역 정해리를 연기하는 진지희다. 지금껏 이처럼 독한 아역을 본 적이 있을까. 하지만 ‘아내의 유혹’을 패러디한 ‘해리의 유혹’편에서 민소희로 변신한 모습은 그 독한 설정을 과장되게 볼 수 있으면서도, 역시 아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늘 신애의 물건을 “내거야”하면서 빼앗던 해리가 신애가 쓴 동화를 끝까지 읽기 위해 갖은 일을 해내는 장면은 독함과 귀여움이 교차하는 해리만의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이밖에도 ‘지붕 뚫고 하이킥’에는 호감 가는 캐릭터들이 즐비하다. 이현경 역할로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는 오현경이 그렇고, 이순재와 멜로 연기를 보여주는 김자옥이 그러하며, 한없이 불쌍한 신파적 존재로서 보여지다가도 꽤 엉뚱하고 예쁜 면모를 드러내는 신세경이 그렇다. 신세경을 중심으로 다층적인 멜로를 이루는 이지훈(최다니엘)과 정준혁(윤시윤)도 까칠함과 세심함을 왔다 갔다 하며 매력을 드러내고 있고, 원어민 강사로 나오는 줄리엔의 따뜻함과 거꾸로 말하는 반어법 교장선생님도 짧지만 큰 웃음을 주는 존재다.

이처럼 ‘지붕 뚫고 하이킥’에 포진한 연기자들은 저마다 자신을 망가뜨려 큰 웃음을 주는 연기자들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지점에서 이들 연기자들은 지금 이른바 ‘재발견’되는 기회를 얻고 있다. 이 작품 전과 이 작품 후의 이들 연기자들이 가지게 될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지금 이 작품이 주는 기회의 크기를 새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망가질수록 빛나는 그들. ‘지붕 뚫고 하이킥’이 보여주는 망가짐의 미학의 실체다.

 ‘천만번 사랑해’, 심청 모티브? 신데렐라 이야기? 모성애!

‘천만번 사랑해’는 여러 가지 이야기의 모티브들이 겹쳐져 있다. 그 첫 번째 이야기의 모티브는 우리네 고전 중의 고전, ‘심청전’이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이처럼, ‘천만번 사랑해’의 고은님(이수경)은 갑자기 쓰러진 아버지의 수술비를 벌기 위해, 대리모를 자청한다. 자살을 택하는 것이 비윤리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심청이의 정당성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대리모의 비윤리성은 아버지의 목숨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고은님의 정당성을 만들어준다.

결국 아버지는 살려내지만, 자신의 살을 베어낸 것 같은 대리모의 아픔은 고은님에게 천형처럼 남는다. 스스로 사랑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하지만 이 부분에서 신데렐라 이야기가 들어선다. 죽음 앞에 서 있는 아버지를 두고도 여전히 자기들 살 궁리에만 골똘하는 계모와 배다른 언니 난정(박수진)은 ‘신데렐라’ 속의 계모와 언니들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게다가 난정이 좋아했던 현대판 백마 탄 왕자님 강호(정겨운)는 우여곡절 끝에 고은님을 좋아하게 된다.

심청의 이야기나 ‘신데렐라’의 이야기나 모두 그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극단적인 신파와 판타지적인 해결이다. 심청은 아버지를 위해 희생하는 효녀로서 죽음이라는 바닥에서 절절한 눈물을 흘리지만, 결국 용왕에 의해 구출되어 왕후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신데렐라’는 상드리용(Cendrillon), 즉 재를 뒤집어 쓰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늘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일을 해서 붙여진 것이다. 즉 이 전형적인 구박받는 며느리 같은 ‘신데렐라’는 우여곡절 끝에 왕자와 결혼하는데, 이 모티브는 현대 트렌디 멜로의 전형이 되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신파의 끝에 극단적인 판타지를 제공하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천만번 사랑해’의 핵심 모티브가 된다. 고은님은 대리모의 아픔을 숨기고, 자신은 더 이상 사랑조차 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여기는 바닥에 내려서서 저 위에서 손을 내밀고 있는 강호를 만나게 된다. 따라서 기본적인 이야기는 이 고은님이 결국에는 자책감과 고통에서 벗어나 다시 행복을 찾는다는 것이 그 골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강호가 ‘신데렐라’ 이야기에서처럼 겉으로 보기엔 왕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함께 살아온 엄마, 손향숙(이휘향)의 친 자식이 아니다. 그래서 집안에서도 늘 자신은 천덕꾸러기 신세로 살아온다. 이 지점에서 강호와 은님의 만남은 어떤 새로운 접합점을 갖게 된다. 그것은 모성애다. 즉 강호는 단 한 번도 살아오면서 모성을 가져본 적이 없는 인물이고, 은님은 대리모를 겪으면서 삶의 태도가 모성으로 바뀌어버린 인물이다. 강호의 모성 없는 빈자리는 은님의 모성이 채워준다.

이 지점에 이르면 이 ‘천만번 사랑해’의 이야기가 겉으로 갖고 있는 심청이나 신데렐라의 모티브는 드라마의 극적 재미를 위해 설정된 것일 뿐,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결국 은님과 강호의 행복은 다만 결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잃어버린 모성을 되찾아야만 행복에 이를 수 있다. 강호는 자신의 집안에서 정당한 자식으로서의 위치를 인정받아야 하고, 은님은 비밀처럼 숨겨진 대리모의 사건이 오히려 밝혀져 그 속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천만번 사랑해’는 이처럼 복잡한 이야기들의 모티브들이 마구 뒤엉켜 있지만 결국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모티브가 갖는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단지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전격적으로 그려냈다면 아마도 이 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 주는 고전적인 판타지(즉 신파에서 판타지적 성공에 이르는)의 재미를 놓쳤을 테니까. ‘천만번 사랑해’는 분명 어딘가 지금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퇴행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주말 밤의 주 시청자들에겐 이러한 고전적인 이야기들이 주는 힘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