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싱9>의 눈물, 진심이 느껴진 까닭

 

<댄싱9>. 이건 실로 오디션의 끝판왕이라고 할만하다. 그것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핵심이 이제는 더 이상 경쟁과 서바이벌이 아니라는 것 때문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중들이 집중하기 시작한 것은 제 아무리 경쟁의 시스템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보여지는 ‘공존과 협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K팝스타>가 배출했던 수펄스가 그랬고, <보이스 코리아>의 백미인 콜라보레이션 미션이 그랬다.

 

'댄싱9(사진출처:mnet)'

그런데 <댄싱9>은 차원이 다르다. 가창의 영역에서 콜라보레이션은 이미 일상화된 것이지만, 춤은 아직까지 실험적인 단계가 아닌가. 도대체 현대무용과 스트릿댄스가 어우러지고, 한국무용과 재즈댄스가, 또 댄스스포츠와 스트릿댄스가 어우러지는 무대를 우리가 어디서 접하겠는가. 물론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같은 작품을 통해 비보잉과 발레가 접목됐을 때나, 숙명가야금 연주단과 비보잉 그룹 라스트포원이 만나 절묘하게 꾸며지는 무대를 봤을 때 그 감동이 배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나.

 

단 6시간 정도를 주고 이 다양한 장르의 춤을 한 무대로 선보이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자못 무모한 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무대 위에 올라온 결과물을 보면 이건 기대 이상이다. 단지 춤이라는 공유점 하나만을 갖고도 이들은 어떻게 이런 놀라운 결과를 보이는 걸까. 스트릿 댄스를 하는 서영모가 캡틴인 무대에서 한국무용을 하는 김해선의 압도적인 표정으로 무대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장면이나, 스트릿 댄스의 하위동이 캡틴으로 나선 무대에서 현대무용을 하는 이선태가 그 느낌을 맞춰주는 장면은 순간 이 무대가 오디션이라는 사실조차 잊게 만든다.

 

물론 오디션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올라가고 누군가는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최선의 무대를 향한 이들의 의지는 심지어 합격과 불합격의 차원을 넘어서는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거의 모든 무대 미션은 울음바다가 되기 마련이다. 팀을 이끌었던 캡틴은 누군가 떨어진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기 일쑤고, 떨어진 팀원들은 오히려 캡틴에게 감사를 표한다. 심지어 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떨어뜨린 마스터들도 눈물을 글썽인다. 이들은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틀 속에 들어와 있지만 모두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눈치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도 <댄싱9>이라는 무대가 이들 춤꾼들에게 주는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일 게다. 춤. 사실 지금껏 춤은 대중문화의 중심에 들어온 적이 별로 없었다. 현대무용이나 발레 같은 클래식은 어딘지 대중과 유리된 어떤 세계처럼 치부되어왔고, 비보잉 같은 스트릿 댄스는 세계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에 반짝 관심이 모였다고 해도 그것이 그들의 위상을 바꿔주지는 못했다. 댄스 스포츠는 <무한도전>이나 <댄싱 위드 더 스타> 같은 프로그램으로 전면에 세워진 적이 있으나 여전히 대중문화의 메인스트림으로 자리하지는 못하고 있다.

 

대신 춤 하면 여전히 대중들에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백댄서. 춤바람. 심지어 제비가 아니던가. 그들은 그렇게 가수들 뒤에서 춤추는 존재들로 치부되어 왔고, 심지어 사모님을 돌리고 돌리는 그런 타락의 존재들로 비하되어 왔다. 이런 편견은 고전무용이나 현대무용 같은 클래식을 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어딘지 대중과 유리된 귀족들만을 위한 춤처럼 여겨지지만 막상 당사자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춤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게 그들의 현실이 아니던가.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과거 한 스포츠화 광고에서 이종원이 의자 하나를 놓고 보여준 현대무용이 대중들을 열광시킨 적이 있었고, <백야>의 미하일 바르시니코프는 놀라운 연속 턴으로 발레의 세계에 우리를 푹 빠뜨린 적이 있었으며, 최근에도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한 <블랙스완>이나 하다못해 <개그콘서트>에서 발레를 소재로 했던 ‘발레리노’가 화제가 됐던 적이 있었다. 춤은 그렇게 늘 우리 주변에 있으면서 한때 우리를 주목시키기도 했지만 그것이 하나의 독립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장르로 인식되지 못하고 광고나 영화 심지어 개그의 소재로서 일회적인 관심에 그쳤던 감이 있다.

 

‘백댄서’로 표상되듯 늘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 서서 누군가를 돋보이게 했던 그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을 비로소 온전히 무대의 중심에 세워준 <댄싱9>이라는 무대가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 있을 것인가는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게다. 그들이 눈물을 펑펑 흘리는 것은 그 간절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말해주는 것이고, 또한 춤의 장르는 달라도 ‘춤꾼’이라는 한 마디로 모두가 공감하는 현실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경쟁과 콜라보가 절묘하게 만나는 지점에서 <댄싱9>이 우리에게 새롭게 보여주는 ‘춤꾼’의 세계는 그들이 갖고 있는 경쟁적인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도 ‘춤’이라는 공유지점으로 하나 되는 모습을 지극히 실제적으로 보여준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적어도 춤꾼들을 백댄서 혹은 화석화된 고전을 여전히 시연하는 존재 정도로 보는 시선은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그 누가 이들을 더 이상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이토록 아름답고 인간적인 몸의 언어들을 통해 대중들과 소통하려 몸부림치는 그들을.

할배들, 할매들보다 훨씬 보여줄 게 많다

 

항간에는 <꽃보다 할배>의 할매판으로 불리는 <마마도>. 평균나이 68세의 중견 여배우 4인방이 이태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콘셉트다. 이미 그대로 베낀 게 아니냐는 논란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 방송이 나오지 않은 터라 뭐라 말하긴 어렵다. 다만 이 할머니들이 여행을 떠나는 콘셉트가 과연 괜찮은 기획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는 있다. 과연 <마마도>는 <꽃보다 할배> 같은 재미와 의미를 뽑아낼 수 있을까.

 

'꽃보다 할배(사진출처:tvN)'

김영옥(75), 김용림(73), 이효춘(63), 김수미(61). 일단 김수미를 제외하고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그다지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중견 여배우들이다. 김수미는 <런닝맨> 같은 젊은 취향의 예능에도 출연한 바 있어 젊은 세대들에게는 괜찮은 기대감을 만드는 게 사실이다. 김용림도 <풀하우스>에 나온 적이 있지만 그다지 예능적인 존재감을 보인 바는 별로 없다. 김영옥과 이효춘은 아예 예능에서 보기 힘들었던 인물들이다.

 

최근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이 추구하는 것이 ‘재발견’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들 중 김수미보다 오히려 김영옥이나 이효춘이 의외의 모습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어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훨씬 예능감이 좋고 적응되어 있는 김수미가 전면에 부각되게 되면 자칫 전체 흐름이 그녀 중심으로 흐를 가능성도 있다. 다행스러운 건 그녀가 막내라는 점이다. <꽃보다 할배>에서 백일섭이 맡은 역할을 생각해보면 김수미에게서 기대되는 점은 의외로 언니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일 수 있다.

 

<꽃보다 할배>가 할아버지들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안정적인 재미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이서진이라는 짐꾼 덕분이었다면 <마마도>에서 이태곤의 역할 또한 중요할 수밖에 없다. 과거 <정글의 법칙>에 출연해 의도치 않은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던 이태곤이기에 생각보다 기대감이 크지는 않지만, 그 역시 늘 카리스마를 보였던 모습과 정반대로 왕 누나들 사이에서 어린 동생 역할을 보여준다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마마도>의 아킬레스건이 <꽃보다 할배>과의 끊임없는 비교점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점이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들만큼의 재미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할아버지들의 배낭여행이 훨씬 재미있을 수 있었던 건 우리 사회에서 어르신들 하면 떠오르는 일종의 선입견을 할아버지들이 더 파괴력 있게 깨버릴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들은 이른바 권위의 상징이 아니었던가. 그 권위가 내려지는 지점에 <꽃보다 할배>의 핵심적인 재미가 존재한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사정이 다르다. 사회적으로 어르신의 변화라고 하면 할머니들이 아니라 할아버지들의 변화를 떠올리는 건 그만큼 과거 갖고 있던 권위를 내려놓게 된 이들이 할아버지들이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이 보여줄 수 있는 의외의 재미에 대한 기대감이 할아버지들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마마도>를 <꽃보다 할배>와 비슷한 흐름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생기는 편견일 수 있다. 즉 방송이 나와 봐야 제대로 판단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방송 이전에 소재만으로도 갖게 되는 기대감은 프로그램의 성패에 대단히 중요하다. <꽃보다 할배>는 방송 이전부터 할아버지들의 배낭여행이라는 소재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기대감을 주었던 프로그램이 아닌가. 과연 <마마도>는 이런 한계점들을 극복하고 <꽃보다 할배>와는 다른 결의 프로그램임을 입증해낼 것인가. 아니면 그저 베끼기 프로그램이라는 오명으로 남을 것인가. 귀추가 주목되는 시점이다.

크레용팝의 일베, 표절 논란, 과연 마녀사냥일까

 

시쳇말로 ‘진격의’ 크레용팝이 요즘은 논란의 크레용팝이 된 듯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들의 이름이 오르내리지만 그것이 순전히 인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베 논란은 이미 있었지만 크레용팝의 존재감이 점점 커지면서 그 논란도 점점 거인이 되어가고 있다. 일본의 걸 그룹 모모이로클로버Z를 거의 복사수준으로 표절했다는 논란까지 불거졌다.

 

'크레용팝(사진출처:크롬엔터테인먼트)'

항간에는 연일 계속 터지고 있는 크레용팝 논란을 마녀사냥으로 치부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게 보긴 어렵다. 마녀사냥이라면 전혀 근거 없는 이유를 갖다 붙여 집단으로 낙인을 찍는 것이지만, 크레용팝의 일베 논란이나 표절 논란이 전혀 근거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이미 여러 차례 일베 용어를 사용한 정도가 아니라 일베를 마케팅적으로 활용하려 했던 점이 SNS 내용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표절 논란 역시 헬멧을 쓰고 트레이닝복을 입는 점이 같다는 그런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 캐릭터 코스프레 코믹 콘셉트가 비슷하다는 점은 이 논란이 아주 근거 없다 여겨지지 않는 이유다. 물론 표절 논란까지 불거진 것은 일베 논란에서부터 비롯된 대중들과의 소통의 실패가 점점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생겨난 결과일 수 있다. 복제가 일상화된 시대에 표절은 이제 진실의 문제라기보다는 호불호의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마녀사냥’이라는 말은 이미 크레용팝 소속사 사장이 해명 글에서 먼저 사용한 말이다. 그는 ‘저희가 그냥 미우셔서 마녀사냥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면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썼다. 그 해명 글의 핵심적인 내용은 자신들이 영세한 기획사이고 그러다 보니 일베 뿐만 아니라 대다수 유명 커뮤니티에 가입해 ‘정보습득’을 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에 굳이 ‘마녀사냥’이라는 단어를 왜 사용했는지 의문이다. 이 말에는 자신들은 피해자일 뿐이고 대중들이 마녀사냥 하는 가해자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해명으로서 적절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한 일베 논란이 거세지자 크레용팝의 멤버인 웨이가 트위터에 해명의 글을 남기며 사용한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의(豕眼見惟豕 佛眼見惟佛矣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표현도 적절했다 여겨지지 않는다. 물론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특정인들을 지칭해서 사용한 말일 수 있지만, 보편적인 대중을 상대하는 연예인으로서 이런 식의 해명은 잘못된 일이다. 비판도 관심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면 비판하는 이들을 모두 돼지로 몰아세우는 표현을 쓸 수 있었을까.

 

일베 논란과 표절 논란을 떼어 놓고 크레용팝이라는 우리에게는 새로운 걸 그룹 스타일과 그들이 내놓은 ‘빠빠빠’라는 곡만을 놓고 보면, 그것이 콘텐츠적으로는 꽤 괜찮은 도발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껏 우리가 봐 왔던 천편일률적인 걸 그룹의 콘셉트를 뒤집는 발상의 전환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 번 들으면 좀체 잊혀지지 않는 ‘빠빠빠’라는 곡이 음악적으로 거둔 성과도 분명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 시대에 콘텐츠보다 더 중요해진 것은 대중과의 소통이다. 제 아무리 좋은 콘텐츠도 대중과 소통되지 않아 비호감이 되어버리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게 요즘이 아닌가. 한때 잘 나갔지만 소통에 실패해 나락으로 떨어진 사례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알고 있다. 티아라가 그렇고, 최근에는 비가 그렇다. 크레용팝이 지금 같은 소통방식을 계속 구사한다면 자칫 콘텐츠와 상관없이 논란만 무성한 걸 그룹으로 전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논란들을 먼저 ‘마녀사냥’이라고 단정 짓는 순간부터 소통은 요원해진다. 그것은 연예인과 팬으로 엮어져야할 관계가 피해자와 가해자로 구획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항간에는 이제 걸 그룹의 활동도 진보와 보수 같은 이념적인 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상식을 벗어난 일련의 활동들을 보이는 일베를 진정한 보수라고 보기는 어렵다(이건 보수쪽에서도 발끈할 일이 아닌가!). 즉 이것은 이념의 문제도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갖고 마녀사냥이니 이념의 문제니 거창하게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그저 상식의 문제다. 노골적인 성희롱과 고인에게 침을 뱉는 행위가 일상화되어 있는 비상식적인 공간과 연루되어 있으니 대중들로서는 당연히 싫을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니겠나. 물론 무명의 영세한 기획사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초반에 무리한 홍보 마케팅을 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 대중들의 주목을 받는 입장에서는 잡음이 생길 자그마한 대중들의 정서까지도 배려하는 관리가 필요하다. 콘텐츠에 실패하면 또 다른 콘텐츠로 승부할 수 있다. 하지만 소통에 실패하면 모든 걸 잃게 되는 시대다.

박민하, 예능보다는 연기에 집중하는 편이

 

단언컨대 영화 <감기>의 지분율이 있다면 그 절반 이상은 온전히 아역 박민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장혁이 시종일관 뛰어다니고 수애가 발을 동동 구르며 전전긍긍하는 건 전적으로 박민하가 연기하는 미르라는 아이 때문이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이 전대미문의 바이러스에 고통스러워하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모두 이 미르라는 아이의 배경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감기>에서 아역 박민하는 이토록 중차대한 역할을 맡았다.

 

박민하(사진출처:영화<감기>)

아이여서일까. 아니면 봉준호 감독이 극찬한대로 천재 아역이라서 그런 것일까. 조금은 부담일 수밖에 없는 이 미르라는 역할을 박민하는 아무런 이물감 없이 천연덕스럽게 해냈다. 만일 아역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약간의 틈입을 만드는 연기력 부족이 느껴졌다면 그것은 이 영화 전체의 몰입을 방해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박민하는 틈입을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관객들이 더 극에 몰입할 수 있는 여지까지 만들어냈다.

 

초반부 여느 아이와 다를 바 없는 일상적인 모습에서 시작해 차츰 긴장감을 높이는 박민하의 표정의 변화는 이 영화의 고조되는 극과 거의 동일선상에서 움직인다. 연기라고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아이의 감성을 백 프로 끌어내면서도 어떤 점이 관객들의 마음을 건드릴 지 알고 있는 듯한 여유마저 엿보이는 이 아역에게서 분명 좋은 연기자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나이에 어떻게 이런 게 가능했을까. 심지어 연기 경력도 그다지 많지 않은 상황에서.

 

박민하의 연기는 말 그대로 극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루려는 이야기는 그녀가 <감기>에서 어떤 연기력을 보였는가 하는 그런 점이 아니다. 이토록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아이가 왜 그 동안 심지어 대중들에게 박한 평가를 받아왔는가 하는 점이다. 그녀는 심지어 ‘안티 카페’가 생겼을 정도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그녀가 ‘순수함을 잃고 너무 작위적’이라는 대중들의 반응 때문이다.

 

이제 겨우 만 6세의 아이가 <붕어빵>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주목받고 <해피투게더> 같은 프로그램에 나와 어른 뺨치는 모습을 보여줬을 때 대중들은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아이의 모습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 카메라를 의식한 행동 즉 연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시키면 몇 초만에 뚝딱 눈물을 흘리고 노래를 부르며 울먹이고 또 금세 걸 그룹의 섹시 댄스를 흉내 내는 모습을 아이답다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모습은 최근 리얼 예능이 추구하는 ‘진정성’면에서는 분명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 6세의 아이에게 예능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것과 연기가 요구하는 것의 차이를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연기적인 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게다가 그녀는 타고난 연기자의 자질을 갖고 있다) 비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비판의 소지가 있는 것은 이제 갓 만 6세의 아이가 가진 잠재력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어른들의 배려와 관리다. 박민하라는 아이의 가능성을 알아봤다면 이 아이가 섣불리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이 과연 득이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연기는 본업이고 예능은 그저 하는 것이라고 쉽게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예능에서 만들어지는 부정적인 이미지는 연기자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연기자는 결국 자신의 이미지에 연기가 영향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이라도 <감기>같은 작품을 통해 박민하라는 장차 촉망되는 연기자를 발견한 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이라도 이 아이가 가진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길로 차근차근 걸어 나가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박민하에게 지금 필요한 건 잦은 예능 출연이 아니라 더 좋은 작품을 만나 연기자로서 경험해가며 조금씩 성장해가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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