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해진 언니 이효리는 왜 드센 언니가 됐나

 

5집을 들고 돌아온 이효리에 대한 호평은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5집에는 지난 앨범들과는 달리 자신의 진솔한 삶이 고스란히 손때처럼 묻어났기 때문이다. 트렌드 세터나 섹시 아이콘이라는 이미지는 여전했지만 여기에 조금은 편안해진 스토리텔러 같은 모습이 더해졌다고나 할까. 사실 타이틀곡인 ‘Bad girls’도 좋지만 자신의 이야기가 녹아있는 ‘미스코리아’나 'Holly Jolly Bus', 'Special ' 같은 곡이 더 마음에 와 닿는 건 그 때문일 게다.

 

'안녕하세요(사진출처:KBS)'

그런데 이렇게 새로운 음악을 갖고 나온 이효리에 대해 쏟아지던 호평은 단 몇 주만에 혹평으로 바뀌었다. 음악방송 출연을 2주만 하고 휴식기에 들어간 반면, 예능 프로그램은 줄기차게 나오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들이 쏟아졌다. 이효리는 가수인가 예능인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제기됐다. 여기에 이효리 측근이라는 사람의 쓸데없는 설명은 불에 기름을 부운 격이 되었다.

 

한 매체는 이효리 측근의 얘기라며 음악방송 중단의 이유에 대해 “요즘 가요계가 아이돌 위주로 돌아가고, 음악 방송의 경우 아이돌 팬층이 대다수”라며 “이효리가 음악적으로 추구하는 부분과 다소 맞지 않고 고충이 있어 우선적으로 중단하게 됐다"는 식으로 설명을 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액면 그대로만 보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현재의 순위제가 부활된 음악 프로그램은 아이돌 중심이 되어버린 지 오래고, 따라서 이효리 같은 아이돌을 벗어난(혹은 벗어나려는) 가수들에게는 어색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개념 있는 행보’라고도 볼 수 있는 이효리의 음악방송 중단은 호평보다는 혹평을 더 받았다. 이유는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과소비되면서 생긴 그녀의 왜곡된 이미지 때문이다. 똑같은 모습도 너무 많이 보이게 되면 진력이 나기 마련이다. 제 아무리 이효리라도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계속 나오는 것은 시청자들로서는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여기도 이효리, 저기도 이효리인 상황은 심지어 짜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효리만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자칭 타칭 예능 고수(?)인데다 실제로 출연한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올리기까지 하는 상황이니 그녀를 모시려는 프로그램이 줄을 서는 건 당연한 일일 게다. 게다가 이효리의 입장에서도 예전 프로그램을 통해 인연이 있는 PD들의 출연 요청을 거절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계속해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것이지만, 문제는 예능이 이효리를 소비하는 방식에도 있다.

 

모든 프로그램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몇 프로그램들은 이효리를 ‘기 센 여자’로 캐릭터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해피투게더>는 제목에 걸맞게 여러 출연자가 함께 해피한 모습을 보여줘야 균형이 맞지만 이효리가 출연한 분량에서는 거의 그녀의 독무대처럼 그려졌다. “난 쿨한 여자니까.”라는 이효리의 전용멘트는 이런 상황에서는 쿨함을 넘어 ‘기 센 여자’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심지어 돌직구가 쿨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건 그것이 순수하고 솔직한 느낌을 전해주었을 때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자칫 드센 느낌으로 변질될 수 있다.

 

또한 <맨발의 친구들>이나 <안녕하세요> 같은 프로그램에서 이효리는 센 캐릭터를 잡는 더 센 캐릭터로 그려졌다. ‘강호동 잡는 이효리’는 ‘효리성 복통’을 앓는 강호동을 통해 웃음을 줄 수 있었지만 그녀의 센 이미지를 강화시킨 것도 사실이다. 또 <안녕하세요>에서는 아예 대놓고 이영자에게 독설을 날려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그러자 이효리는 과거 이영자의 ‘안 좋은 일’을 거론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예능이 일관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이효리의 ‘기 센 여자’ 이미지는 과거처럼 쿨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긴 부정적인 이미지는 음악 방송 중단 같은 소신 있는 행동조차 ‘너무 나대는 이미지’로 보이게 만든다. 측근의 설명은 그런 뜻이 아니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이효리와 아이돌을 음악적으로도 비교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그녀에 대한 달라진 대중정서의 변화 때문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예능 프로그램이 만들어내고 있는 ‘기 센 여자’ 이미지는 이번 5집 앨범이 기대하게 만든 이효리의 보다 성숙한 이미지와도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5집 앨범의 분위기는 그녀로 하여금 그저 ‘센 언니’가 아니라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성숙한 언니’를 기대하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예능 프로그램으로 돌아오자 그녀는 예전의 모습으로 반복 소비되고 있다.

 

새 음반을 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본격 활동을 나선 이효리로서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자친구를 만나고 순심이 같은 새로운 사회활동을 통해 삶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면서 그런 변화된 삶이 음악으로 뭉쳐져 결실을 맺은 5집은 그녀의 새로운 출사표지만 달라진 그녀를 받아줄 수 있는 방송 프로그램은 없었던 셈이다.

 

순위제가 부활된 음악 프로그램은 달라진 자신의 음악적 성향과는 잘 맞지도 않고 또한 아이돌을 벗어난 나이의 자신 같은 가수들에게는 어딘지 어색한 무대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이효리만이 느끼는 것이 아닐 게다. 실로 우리네 음악 프로그램에서 아이돌이 아닌 싱어 송 라이터나 순위와는 상관없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음악인들이 음반을 냈을 때 그들에 맞게 노래를 소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몇 개나 되는가. <유희열의 스케치북> 같은 조금은 밀려난 시청 시간대에 남아있는 음악 프로그램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또한 예능 프로그램은 달라진 이효리의 모습이 아니라 과거 이효리가 예능에서 효과를 봤던 ‘센 이미지’만을 불러와 소비시켰다. 물론 프로그램들은 이효리를 통해 화제도 얻고 시청률도 얻었지만 이효리에게는 그다지 좋은 효과를 내지 못했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이효리는 음원을 냈을 때의 호평이, 본격적으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혹평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물론 잘못된 이미지 노출의 문제가 가장 크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이효리처럼 아이돌을 벗어난 나이에 이제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하려는 가수들이 설 수 있는 무대나 프로그램이 많지 않은 작금의 안타까운 현실이 깔려 있기도 하다.

<출생의 비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경두, 다만 기억 못할 뿐

 

“경두씨가 얼마나 바보 같은 남자냐면요. 자기를 버린 아버지의 여자를 돌봐요. 몸도 성치 않은 노인네를 어떻게 혼자 두냐며, 그쪽의 아버지를 돌본다구요!” 경두(유준상)를 짝사랑하는 연정(조미령)은 이현(성유리)에게 이렇게 외친다. 이현에게 이제는 경두의 정을 떼어 달라고 부탁하러 온 연정이지만 그녀가 전하는 말 속에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경두 같은 남자에 대한 절절한 마음이 묻어난다.

 

'출생의 비밀(사진출처:SBS)'

“나는 어디선가 마음이 베었을 때 경두씨가 제일 먼저 생각나요. (중략) 뭔가에 마음이 다쳐 가라앉아 있으면 경두씨 안절부절 못하죠.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고 왜 그렇게 됐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저 사람한테 어떻게 해줘야 하나 어떻게 해주면 저 사람이 다시 웃을까 그 바보처럼 쩔쩔매는 모습만 봐도 벌써 위로가 되죠. 어떻게 세상에 그런 남자가 있을 수 있는지. 전 남편한테 맞고 살았던 나는 경두씨 같은 남자가 세상에 있을 거라고 생각 못했어요.”

 

경두는 그런 남자다. 아내였던 이현이 딸과 자신을 버린 채 사라져버려도, 또 기억에서조차 지워버려도 그는 그녀를 위해 그녀가 좋아했던 만두를 챙기는 바보 같은 위인이다. 금쪽같은 딸 해듬이(갈소원)를 그녀가 데려간다고 했을 때도 그녀와 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비워주고는 뒤에서 눈물을 훔치는 바보 중의 바보다. 그러면서도 수박 한 조각을 봐도 먼저 그녀를 떠올리고 혹 아프다는 얘기를 들으면 단박에 달려와 그녀를 위해 죽과 콩나물국을 끓여내는 남자다. 자신을 버리고 딸마저 데리고 떠난 여자의 아버지를 돌보는 남자. 연정이 말하듯 경두는 주변사람들을 웃게 해주기 위해 늘 쩔쩔맨다. 도대체 이런 사람이 있을까.

 

<출생의 비밀>은 왜 이렇게 바보 같은 경두라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을까. 그리고 이런 착하기 그지없는 인물을 내세우면서 왜 제목을 흔히 막장드라마들이 줄곧 사용하는 클리쉐에서 차용한 것일까. 즉 <출생의 비밀>은 제목과는 달리 막장드라마들이 사용하곤 하는 클리쉐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아니 정반대의 길이다. 경두라는 캐릭터가 말하는 ‘출생의 비밀’이란 현재 막장드라마들이 즐겨(?) 사용하는 가족을 파탄내는 그런 코드가 아니다. 오히려 파탄 난 가족을 다시 묶어내는 방식으로서의 ‘출생의 비밀’이다.

 

사실 친 부모는 누구였고 그 친 부모가 재벌가의 회장님이었다는 식의 천박한 천민 자본주의식의 신분상승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출생의 비밀’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출생의 비밀’은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그 ‘출생의 비밀’을 말한다. 누구나 ‘내가 어떻게 태어났지’하고 물을 때 갖게 되는 그 ‘출생의 비밀’, 바로 누군가의 절절한 사랑 말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사랑이 있었기에, 그들의 보이지 않는 배려와 희생이 있었기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든 주변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려 발을 동동대는 경두만 봐도 마음 한 구석이 먹먹해지는 이유는 그 캐릭터가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어떤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출생의 비밀 속에 어른대는 경두 같은 인물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게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점점 기억에서 지워버린 그 출생의 비밀을 이 드라마는 그래서 경두라는 인물을 통해, 또 해듬이라는 아이를 통해 우리에게 다시 떠올리게 해준다.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을 잃어버린 존재, 이현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녀가 차츰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도 어쩌면 각자 갖고 있었지만 기억 저편으로 잊혀져갔던 경두 같은 인물의 끝없는 사랑으로 존재하는 자신, 즉 각자의 ‘출생의 비밀’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경두가 해듬이에게 너는 이담에 커서 뭐가 될 거냐고 묻자 해듬이는 엉뚱하게도 ‘가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왜 가지는 가지고, 오이는 오이고...(중략) 왜 가지는 보라색이고 오이는 연두색이고...(중략) 유전이를 공부하면 다 안댜.” 할아버지가 그랬듯 유전을 공부하고 싶다는 것이다. 경두가 해듬에게 ‘유전’이가 누구냐고 묻자 해듬이 말한다. “누구가 아니구요. 홍경두가 홍해듬을 낳고 포목점 할머니가 연정 아줌마를 낳고 태만이 아저씨네 개가 애기 개를 낳으면 애기 개가 엄마 개를 닮는 게 유전이여.”

 

실로 복잡하게 뒤엉킨 ‘출생의 비밀’을 자극적인 코드로 다루는 드라마들이 많지만 정작 진정한 의미의 ‘출생의 비밀’을 다루는 드라마는 전무하다. 이것은 어쩌면 자극적인 것들만 기억에 남게 되어버린 작금의 세태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태어나 닮아간다는 이 단순하지만 신비롭고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출생의 비밀’은 그래서 더욱 귀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 드라마 <출생의 비밀>은 이렇게 현 세태가 오독시키고 있는 ‘출생의 비밀’이라는 코드를 기분 좋게 뒤집고 있다. 실로 ‘출생의 비밀’을 다루겠다면 이 정도는 되야 하지 않을까.

<이순신> 어쩌다 남자 캐릭터가 전멸했을까

 

남자 캐릭터가 전혀 없는 드라마. 있다고 해도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는 드라마. 어쩌다 <최고다 이순신>은 이런 이상한 드라마가 되어 버렸을까.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신준호 역할을 연기하는 조정석은 그 이름만으로도 이 드라마를 보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으니까.

 

'최고다 이순신(사진출처:KBS)'

초반 신준호는 기획사 대표답게 연기를 지망하는 이순신(아이유)을 최고의 위치로 끌어올릴 백마 탄 왕자님으로 주목받았다. 물론 너무나 틀에 박힌 식상한 설정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역할을 연기할 조정석의 남다른 매력이 있어 색다른 몇 가지의 변주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겨졌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조정석은 드라마의 중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출생의 비밀’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 때부터 드라마는 두 엄마, 즉 김정애(고두심)와 송미령(이미숙)의 대결 중심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 끼어버린 이순신이 상처받고 눈물 흘리고 토로하는 장면들만 반복되었다.

 

조정석의 역할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이순신을 바라보고 걱정하는 모습이 최근 그가 맡은 역할의 대부분이다. 이것은 그간 조정석이라는 연기자에 대한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건축학 개론>에서 조역이지만 주인공만큼 주목을 받았던 납득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었고, <더킹 투하츠>에서는 그와는 상반된 진지한 매력으로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가 아닌가.

 

그런 그가 <최고다 이순신>에서 그저 그런 역할에 머물고 있다는 건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작품과 캐릭터의 문제이지 조정석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이 작품의 다른 남자 캐릭터들을 봐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언니인 유순신(유인나)과 멜로를 만들어가는 박찬우(고주원)도 드라마가 ‘출생의 비밀’에 허우적대기 시작하면서 그 역할이 미미해져버렸다.

 

이것은 이순신네 집의 맏언니인 이혜신(손태영)도 마찬가지다. 이혜신은 이혼사실이 들통 나면서 좀 더 비중을 가질 수도 있었고 동시에 그 멜로 상대인 서진욱(정우)과의 알콩달콩한 이야기도 더 진행될 수 있었다. 서진욱이라는 캐릭터는 본래보다 더 많은 기대감을 갖게 만든 인물이다. 살짝 살짝 등장했음에도 그 풋풋함이 시청자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정애와 송미령 두 엄마가 한 딸을 두고 서로 자기 딸이다 싸우는 이 출생의 비밀이라는 상투적인 덫에 발목이 잡혀 유순신과 이혜신이 독자적인 이야기를 펼쳐나가지 못하게 되자 그 상대역인 남자들도 덩달아 비중이 줄어든 탓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지금 현재 <최고다 이순신>에는 여성 캐릭터만 그나마 보일 뿐, 남자 캐릭터들이 보이지 않는다. 조정석 같은 가능성 많은 배우를 데려다 놓고 이 정도에 머물고 있다는 건 직무유기가 아닐까.

 

물론 이것은 이 드라마가 지금 현재 ‘출생의 비밀’이라는 코드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다. 추락한 이순신의 위기 상황에 신준호가 제 직분에 걸맞게 그녀의 매니저(물론 사적인 부분까지)를 자처하고 나서면서 캐릭터는 다시 살아날 수도 있을 게다. 또 한바탕 ‘출생의 비밀’의 폭풍이 지나고 나면 박찬우나 서진욱 같은 캐릭터도 의외의 반짝반짝한 매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고다 이순신>의 출생의 비밀 이야기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복선이 이런 기대감마저 희석시킨다. 이순신의 친부가 죽은 이창훈(정동환)이 아닐 거라는 암시는 이미 여러 대목에서 드러난 바 있다. 출생의 비밀 코드가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효과적인 장치라는 것은 맞지만 이렇게 이중의 출생의 비밀 코드까지 쓰게 된다면 자칫 몇몇 캐릭터들은 진짜 병풍이 되고 말 수도 있을 것이다. 제 아무리 시청률도 좋지만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될 것인가.

700회 잔치에 701회를 준비하는 <개콘>

 

700회. 연수로 무려 14년. <개그콘서트>는 그 수치만으로도 이미 대단하다. 물론 이 수치는 1980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30여 년이 넘게 방영된 장수 예능 <전국노래자랑>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전국노래자랑>의 1년과 <개그콘서트>의 1년은 그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트렌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개그라는 소재의 특성 때문이다. 매번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야 하고 캐릭터를 만들어야 하며 당대의 현실 또한 세심히 살펴야 한다. 그래야만 대중들과의 공감대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14년이 대단할밖에.

 

'개그콘서트(사진출처:KBS)'

그런데 이 수치만으로도 대단한 700회 특집에 즈음해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박지영 PD는 대대적인 물갈이가 있을 것을 예고했다고 한다. ‘생활의 발견’, ‘거지의 품격’ 같은 한때 가장 뜨거웠으나 이제는 식어버린 개그를 종영시킨 것처럼, 앞으로도 코너 물갈이를 본격화하겠다는 것. 이것은 최근 <개그콘서트>에 제기되고 있는 위기설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박지영 PD는 “700회보다 701회가 더 중요 하다는 게 제작진의 생각”이라고 했다고 한다. 지당한 얘기다.

 

<개그콘서트>가 무려 14년을, 그것도 그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뜨거운 예능의 중심에 서서 버텨낼 수 있었던 저력이 바로 지금까지의 행보에 만족하기보다는 앞으로의 한 걸음을 준비하는 그 자세였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껏 <개그콘서트>의 위기설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매번 그 때마다 새로운 기수들이 등장해 새 바람을 일으키곤 했다. 선배들이 앞에서 잘 나갈 때, 그 뒤를 묵묵히 받쳐주면서 다음을 준비해온 후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또 그 후배들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선배들이 있기 때문에 <개그콘서트>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최근 박성호, 김대희, 김준호의 이른바 원로회의(?)에서 멘토-멘티제를 제작진에게 건의한 사실은, <개그콘서트>가 위기 상황을 맞았을 때 얼마나 개그맨들이 스스로 위기를 넘기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사실 새로운 코너를 짜도 새롭게 느껴지지 않고 어딘지 비슷비슷하다고 여겨지는 건 결국 그걸 만드는 개그맨들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늘 친한 개그맨들끼리 만들다보니 어떤 정체의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작위로 선배와 후배를 뽑아 한 조를 만들어 코너를 짜는 방식은 개그맨들에게는 조금 힘든 길이지만 그렇게 나온 개그는 새로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최근 호평 받고 있는 ‘황해’는 그 대표적 사례다.

 

결국 <개그콘서트>의 힘은 개그 소재나 아이디어 그 자체보다 개그맨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개그맨들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낼 수 있는 시스템의 끊임없는 보완은 <개그콘서트>가 진화할 수 있었던 저력이었던 셈이다. 이번 700회 특집에 특별출연하는 개그맨들의 면면을 보면 그 진화가 꽤 오랜 세월에 걸쳐 일어나면서 당대의 스타 개그맨들을 꾸준히 발굴해왔다는 걸 알 수 있다.

 

수다맨 강성범, 미친 존재감 정형돈, ‘생활사투리’에서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기억되는 이재훈, ‘우격다짐’으로 1인 개그를 선보였던 이정수, 설명이 필요 없는 <1박2일>의 이수근과 <정글의 법칙>의 김병만, <진짜 사나이>로 최근 대세가 된 샘 해밍턴 등등, 하지만 이번 700회 특집에 출연하는 반가운 얼굴들이 말해주는 건 이것이 단지 <개그콘서트>만의 성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네 전체 예능의 수혜로 이어져왔다.

 

<개그콘서트> 밖으로 나온 이들 개그맨들은 KBS의 다른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MBC, SBS에서도 맹활약하며 예능의 지평을 넓혀왔다. 개그맨이라는 젊은 피가 우리네 예능에 끊임없이 <개그콘서트>라는 아카데미(?)를 통해 수혈되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 같은 예능의 풍성함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KBS 희극인실에 들어가면 한 쪽 벽에 빽빽하게 기수별로 붙여진 개그맨들의 프로필을 볼 수 있다. 그 중 어느 기수는 다른 기수에 비해 많은 스타 개그맨들을 발굴했고, 또 어떤 기수는 그렇지 못한 결과를 내기도 했다. 후배 개그맨들이 잘 나갈 때 여전히 주목을 받지 못한 선배 개그맨들도 있다. 누구는 좀 더 사랑받았고 누구는 조금 덜 사랑받았다. 하지만 그 경중을 떠나서 거기 프로필로 붙여진 모든 개그맨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700회가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700회 특집보다도 701회를 준비하는 마음. 개그맨들 스스로 좋은 개그를 만들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는 마음. 자신은 조금 덜 사랑받아도 코너를 위해 기꺼이 도우미를 자처하는 자세. 그것이 지금의 <개그콘서트>를 만들었고 그 <개그콘서트>가 있어서 지금의 풍성한 예능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니 그 모든 개그맨들에게는 이번 700회를 즐길 충분한 자격이 있다. 늘 그러했듯이 한 회 한 회를 지금껏 해온 것처럼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다 보면 위기설이 다시 상승세로 바뀔 날이 올 것이고 800회, 900회, 천 회를 기록할 날도 올 것이다. 개그맨들의 그 절실한 노력이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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