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스케4>, 굳이 강용석이 왜 필요할까

 

방송에 있어서 이른바 ‘낚시질’은 그리 비난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프로그램의 재미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그 당락의 결과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이목을 집중시키는 출연자를 잠깐 보여주고 ‘그 결과가 잠시 후에 공개된다’는 식의 편집방식은 궁금증과 호기심을 만들어내 끝까지 프로그램에 집중하게 해준다. <슈퍼스타K(이하 슈스케)4>에서 조앤과 강용석 전 의원은 바로 이 낚시질 편집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다.

 

'슈퍼스타K4'(사진출처:Mnet)

그런데 <슈스케4>를 보다보면 왜 굳이 조앤과 강용석 전 의원의 출연분을 갖고 낚시질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물론 그들이 가진 지명도가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지만, <슈스케4>는 그들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출연자들이 말 그대로 널려 있기 때문이다. 첫 회에서 포복절도의 웃음을 주었던 러통령 박상보, 폭풍감동을 전해주었던 울보 파이터 육진수, 귀여운 아이처럼 등장했다가 놀라운 가창력을 보여준 유승우, 발성장애를 갖고 있으면서도 도전한 연규성, 쏘시지 타령으로 스튜디오를 뒤집어버린 정희라, 잘 생긴 외모에 집안 좋고 노래까지 잘하는 엄친우 김상우 등등.

 

이런 매력이 넘치는 출연자들은 2회에도 여전했다. 싸이의 후배라는 버클리 음대생 출신 군인 김정환, 외모와 달리 절정의 소울을 보여준 반전의 정희훈, 암투병중인 엄마를 위해 노래를 불러 좌중을 눈물바다로 만들어버린 이용혁, 군에서 소녀시대보다 인기가 많은 여군 강수연, 랩과 가창력을 모두 겸비해 백지영의 극찬을 받은 계범주 등. 어떻게 저렇게 많은 출연자들이 저 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무대에 올라 거기에 딱 맞는 노래를 부르는 지 신기할 정도다.

 

정작 낚시질 편집으로 활용된 강용석 전 의원의 무대는 밋밋하기 이를 데 없었다. 노래가 주는 반전도 없었고, 출연의도도 다른 출연자들에 비해서 그다지 절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승철이 던진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건 아니시겠죠?”라는 질문이 가장 주목될 정도로 강용석 전 의원의 무대는 재미나 감동 그 어떤 것도 채워주지 못했다. 이것은 조앤도 마찬가지다. ‘제2의 보아’라는 얘기까지 나왔지만 그녀가 보여준 무대는 기대감을 채워주지 못했다.

 

<슈스케4>가 여타의 오디션과 비교해 슈퍼 갑 오디션인 이유는 거기 출연하는 이들의 면면이 확실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래 실력에 있어서도 출중하고, 참가하는 이유에 있어서도 더 절실하다. 때로는 4차원의 느낌을 주는 엉뚱한 출연자들이 보여주는 끼도 만만찮은 재미를 선사한다. 압도적인 수의 참가자들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보석 같은 출연자들을 선별해낼 수 있는 게 바탕이 되고, 그 위에 출연자들 하나하나의 영상을 마치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이어붙인 듯한 정교한 편집이 재미를 배가한다. 단 몇 분만에 출연자의 캐릭터가 만들어질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정교한 편집의 덕분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슈스케4>는 굳이 강용석 전 의원 같은 인물을 낚시용으로 사용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물론 어떤 인물이 참여한다고 해도 문호가 열려 있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몇 회에 걸쳐 반복 편집해 이목을 끌 필요까지는 없었다는 얘기다. 그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자신들의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듯 느껴질 정도로 개성 강한 출연자들이 있다는 것. 그래서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대중들의 면면을 확인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슈스케4>가 국민 오디션이라는 것이 허명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귀신이 귀여울 정도로 인간은 무서웠다

 

여름철 납량특집 하면 딱 떠오르는 건? <전설의 고향> 같은 귀신 나오는 공포물이 아닐까. 하지만 최근 들어 이건 옛말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공포물 자체가 방영되지 않는 상황이고 그 중에서도 귀신 얘기는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물론 올해는 런던 올림픽이 있었기 때문에 자정부터 새벽까지 납량특집이 편성될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작금의 공포물을 찾아보기 힘든 원인은 이런 시의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공포물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달라진 시선이 존재한다.

 

'아랑사또전'(사진출처:MBC)

한국형 공포물의 대명사였던 <전설의 고향>은 1977년부터 1989년까지 무려 12년 간 578회를 방영하다가 종영했다. 그러다 1996년에 다시 방영이 재개돼서 1999년까지 방영되었고, 그 후로는 여름 시즌 납량특집으로 2008년에 8편, 2009년에 10편이 방영되었다. 이렇게 장구한 세월동안 명맥을 이어왔던 ‘전설의 고향’이 2009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방영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현재의 TV 공포물이 처한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확실히 시대는 바뀌었다. 귀신은 그 자체로 더 이상 우리에게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아랑사또전>은 본래 <전설의 고향>에서도 자주 다루어졌던 이야기다. 어느 고을에 사또가 부임하면 바로 죽어버리는 사건들이 반복되고 나중에 담이 센 사또가 부임해 알고 보니 원한을 가진 처녀귀신의 사연을 듣게 되는 이야기. 결국 사또가 억울한 원혼을 달래주고 고을은 평화를 찾는다는 그런 얘기다. 이 <전설의 고향>에서 공포물로 다뤄졌던 소재가 <아랑사또전>에서는 코믹으로 다뤄진다. 귀신 아랑은 무섭긴 커녕 귀엽고 웃기기까지 한 캐릭터다.

 

이러한 귀신 캐릭터의 변화는 <전설의 고향>이 내세웠던 공포의 대명사인 구미호가 최근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내 여자 친구는 구미호>나 최근 방영되고 있는 시트콤인 <천 번째 남자>에 등장하는 구미호들은 코믹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등장한다. 본래 공포물이란 그 안에 사회의 억압된 부분을 담기 마련이다. 그 억압이 귀신이나 이상한 존재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인데 구미호도 그런 존재다.

 

1970년대에 고부갈등 속에서 초창기 구미호가 열렬한 환호를 받았던 것은 당대 여성들의 억압과 해방이 그 특별한 공포 속에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구미호는 알다시피 맘만 먹으면 누구라도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런 구미호가 왜 굳이 사람이 되려 할까. 그것도 한 사람의 아내가. 이것은 다분히 전통적인 사회의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다. 당대의 구미호는 이런 식으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의 여성들을 그대로 대변하기도 했다.

 

즉 당대의 며느리들은 구미호를 통해 잠시 억압의 탈출을 경험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부장적 사회의 단면이 고부갈등으로 표출되던 1970년대가 아니다. 그러니 '구미호'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2010년도에 재해석된 '구미호 여우누이뎐'에서는 구미호보다 더 무서운 인간이 등장한다.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구미호의 간을 빼먹으려는 인간이 등장하는 것. 즉 21세기 가장 무섭고 억압적인 존재는 더 이상 귀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다 이제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같은 작품으로 와서는 이런 억압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우리와 다른 존재의 대변자로서 구미호와 인간이 공존하는 이야기가 다뤄진다. 이것은 구미호의 새로운 해석이다. 다양한 종족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는 지구촌화된 세상에 새로운 가치로 등장한다. 구미호 이야기는 이제 서로 다른 인종과 국가를 가진 이들이 서로 공존의 길을 찾는 그 보편적인 가치의 이야기로 재해석된다.

 

그렇다면 이제 달라진 시대에 공포물이란 더 이상 불필요한 것이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다만 귀신같은 황당한 이야기로서의 공포물이 아니라 좀 더 현실적인 공포를 다루게 될 거라는 얘기다. 즉 이야기로서의 공포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회적 공포라는 것을 대중들은 이제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올 상반기 드라마에서 대중들을 열광시켰던 ‘추적자’나 ‘유령’ 같은 드라마는 그 기저에 공포물의 감성을 담고 있다. 즉 사회 권력에 의해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되는 개인의 공포를 다룬 것이 바로 ‘추적자’다. 또 ‘유령’은 개인 사찰의 문제라든가, 사이버 테러가 주는 공포를 다뤘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사회적 공포는 권력과 관련을 맺는다는 점에서 사회극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공포물이 사회극과 이란성 쌍둥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여고괴담’류의 귀신 이야기는 여전히 섬뜩하지만 그것이 섬뜩한 진짜 이유는 귀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여고생들이 처한 현실 상황이 끔찍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최근의 공포물들은 이야기 자체의 공포가 아닌 사회적인 공포에 더 많이 천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즘의 공포는 확실히 사건 사고가 주는 공포가 더 크게 되었다. 워낙 끔찍한 사건 사고가 현실에 많다 보니 귀신 이야기 같은 것은 오히려 너무 약한 이야기로 여겨지게 된 것. 씁쓸한 현실이다.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묻지마 폭행, 비정규직이라는 위치를 악용해 벌어지는 성폭력, 마치 장난처럼 벌어지는 왕따 놀이, 그로 인해 생기는 비극들... 이것이 우리를 귀신이야기쯤은 귀여운 것으로 여겨지게 만드는 사회적 공포다. 이것이 작금의 달라진 공포물 얘기를 하다 보면 귀신보다 무서운 게 인간이라는 씁쓸한 현실을 발견하게 되는 이유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 인간 사회를 이토록 공포스럽게 만들어버린 걸까. 귀신이 오히려 귀여워지고 공포물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로 채워지는 이 경향은 우리네 현실의 살풍경을 잘 말해준다. 안타까운 일이다.

티아라를 위해서도 시간은 필요하다

 

티아라의 은정은 결국 드라마 <다섯손가락>에서 하차하게 됐다. 항간에는 제작진의 이 결정에 대해 일방적으로 통보된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속에 담겨진 논리가 애매하다. 티아라 사태로 인해 은정이 출연하게 된 <다섯손가락>이 오히려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그래서 이제 PPL에 차질이 생긴다는 이유로 은정을 퇴출시키는 것은 마치 토사구팽을 연상케 한다는 논리다. 과연 그럴까.

 

'다섯손가락'(사진출처:SBS)

먼저 티아라 사태가 <다섯손가락>에 득(得)을 주었다는 시각은 이해될 수 없다. 물론 관심을 집중시켰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긍정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실(失)로 작용할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티아라 사태로 인해 이미지가 실추된 은정이 출연하기 때문에 드라마를 안보겠다는 시청자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또 PPL이 은정 출연 때문에 어려워진다는 얘기 자체가 대중정서를 반영하고 있다는 증거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다섯손가락> 제작진은 티아라 사태로 인해 거꾸로 피해를 본 셈이다. 마치 CF를 찍은 연예인이 사회적인 구설수에 오르게 되면 해당 기업에게 그 피해가 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실제로 이런 경우에 해당 기업은 그 연예인에게 피해 보상을 요구하기도 하지 않는가.

 

물론 <다섯손가락>에서 은정의 하차 과정에 문제가 없다는 건 아니다. 즉 애초에 티아라 사태가 터졌을 때, 아예 선을 그었다면 훨씬 자연스런 조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제작진들은 티아라 사태의 중대성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결국 뒤늦게 그 중대성을 깨닫고 하차 결정을 한 것이 잡음이 남게 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제작진의 이런 둔감한 반응만큼 이해가 되지 않는 건 티아라 소속사의 행보다. 티아라 사태는 그 본질과 상관없이 소속사의 잘못된 대처로 인해 대중들에게는 왕따의 이미지로 굳어버린 게 사실이다. 즉 퇴출된 화영과 남게 된 멤버들이 보여주는 풍경은 그 자체로 당한 이가 퇴출되고, 가한 이가 버젓이 남아있는 상황으로 인식되게 된 것. 이런 상황을 이해한다면 티아라 멤버들이 버젓이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것이 어떤 이미지를 만들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티아라 소속사는 멤버들의 드라마 출연을 강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것은 어찌 보면 대중정서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무시한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대중들을 상대하는 연예 기획사가 대중정서를 읽지 않는다는 것은 직무유기가 아닐까. 게다가 같은 연예계 종사자로서 드라마 출연 강행이 드라마 제작진들이나 방송사에게도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런 끝없는 구설수 속에서 정작 더 힘들어지는 건 티아라 멤버 당사자들이다. 심지어 티아라 왕따 놀이가 등장할 정도로 사회문제화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멤버들은 그 어떤 방송 출연도 득보다는 실이 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특히 티아라 사태에서는 멤버들의 방송활동 자체가 이들의 왕따 이미지를 더 공고하게 굳혀버리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티아라 사태의 진짜 본질이 실제 왕따인지 아니면 그저 왕따설일 뿐인지는 아직도 명확히 알 수 없다. 멤버 당사자들이나 소속사 대표 그 누구도 명쾌한 해명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처럼 신뢰의 금이 간 상황에서는 그 어떤 해명도 믿음을 주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실이 무엇인가만큼 중요한 것은 대중들이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는 것일 게다.

 

대중정서를 감안해본다면 티아라에게 현재 필요한 건 방송 강행이 아니라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정될 수 있을 때까지의 시간이다. 이 대중정서가 가라앉지 않는 한, 어떤 방송 강행도 티아라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는 어렵다. 소속사가 티아라를 위한다면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현재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대중문화 종사자로서의 사회적인 책무이기도 할 것이다.

'신의', 김종학, 송지나 작품 맞나

 

과연 이것이 김종학 PD와 송지나 작가의 합작품이 맞는 것일까. <신의>가 주는 실망감은 과도한 기대 때문이 아니다. 물론 김종학 PD와 송지나 작가가 손을 잡았다는 점, 이들이 지금껏 시도하지 않았던 타임슬립 소재로 사극과 의학드라마의 퓨전을 다뤘다는 점, 김희선과 이민호 같은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는 것(연기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지명도에 대한 기대다), 게다가 100억 대의 제작비가 들어간 블록버스터라는 사실이 주는 기대감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신의'(사진출처:SBS)

하지만 <신의>의 실망감은 기대치가 너무 커서 거기에 못 미쳤기 때문에 생긴 게 아니다. 이것은 타이틀 롤이 무색하게 기본 자체가 되어 있지 않은 드라마가 주는 실망감이다. <신의>는 연출에서도 대본에서도 연기에 있어서도 그 어느 것 하나 어설프지 않은 것이 없는 졸작이다. 타임슬립이라는 소재를 소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CG는 어색하기 이를 데 없고, 사극의 질을 담보하는 미술이나 조명은 너무 조악해서 마치 중국 B급 무협드라마를 보는 것만 같다. 특히 100억대의 작품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스케일과, 애니메이션 처리된 장면들은 그것이 하나의 연출이라기보다는 제작비를 아끼기 위한 방편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연출의 문제만이 아니다. <신의>는 대본에 있어서도 송지나 작가의 작품이 맞는가 싶게 구성이 어설프다. 기황후의 오빠로 고려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자 기철(유오성)과 최영(이민호)의 대결구도도 막연히 정치적인 대립만이 이해될 뿐, 그다지 감정을 끌어낼만한 팽팽한 긴장감이 생겨나지 않는다. 공민왕과 그 일행들이 원나라를 빠져나오는 과정도 밋밋하기 이를 데 없다. 너무나 전형적인 캐릭터 역시 매력을 갖기 어렵다. 공민왕(류덕환)의 정치적 입장이나 최영과의 관계 역시 뭔가 특별한 사건이 없이 대사로 일관되다 보니 너무 설명적으로 만들어진 느낌이다.

 

이런 연출과 대본 위에서 연기가 살아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게다가 <신의>는 타임슬립을 장치로 의학드라마와 사극을 퓨전한 작품이다. 연기가 호락호락할 수 없다. 이야기가 허공에 붕 떠 있기 때문에 자칫 연기 또한 현실감이 떨어질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사극이 가진 진중함과 진지함이, 현대에서 타임슬립으로 넘어간 신의 유은수(김희선)의 엉뚱하고 가벼운 코믹한 상황과 부조화를 이룰 수 있다. 최영의 진지함이나 유은수의 엉뚱함이 부딪치면서 양측이 모두 과장되게 보여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민호나 김희선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연기를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민호는 <시티헌터>를 통해 보여주었던 그 진지함을 보여주고 있고, 김희선은 확실히 자신이 늘 보여주던 그 비슷한 이미지를 던져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연기는 연기자 혼자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이 어떤 대사와 어떤 영상연출로서 보여지느냐에 따라 연기의 질감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최민수가 까메오로 등장하고 유오성이 홀로 단단한 악역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 효과가 잘 드러나지 않는 건 어설픈 대본과 연출 때문이다.

 

안타까운 얘기지만 <신의>는 과거 블록버스터 드라마의 참극이었던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100억대의 제작비가 들어간 블록버스터 드라마라고 했지만 그 액수가 무색하게 거의 B급 드라마가 되어버린 졸작. 몇몇 잘 나가는 한류스타를 세워두고 제작비를 투자받는 것으로 작품과는 별개로 수익을 노리곤 했던 무늬만 한류 드라마들은 왜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 것일까.

 

<신의>를 드라마의 완성도와 거의 동급으로 여겨지곤 했던 김종학 PD와 송지나 작가가 만들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어째서 이런 조악한 드라마가 만들어졌던 것일까. 이제 고작 4회가 지난 것이지만 이러한 섣부른 비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의학드라마로서의 전문적 디테일도 잘 보이지 않고, 거의 무협지 같은 내용으로 사극으로서의 면모도 잘 보이지 않는 <신의>에서 그 어떤 진정성도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100억 대의 제작비까지 들여가며 만들어졌다는 <신의>는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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