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를 다시 발견하게 만든 드라마, '시크릿 가든'

도대체 이 어메이징한 드라마가 우리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35%의 마지막회 시청률로 '시크릿 가든'의 모든 걸 얘기할 순 없을 것 같다. 정통 멜로드라마가 점점 퇴조하고 있는 요즘, 35%라는 시청률의 체감온도는 50% 이상의 국민드라마에 버금가는 것이니까. 그 체감을 말해주듯, '시크릿 가든'은 그 일거수일투족에 신드롬을 낳았다. "이 어메이징한 여자야." "이게 최선입니가? 확실해요?" "길라임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나?" 김주원(현빈)이 한 말은 그대로 유행어가 되었고, 그와 길라임(하지원)의 스타일은 유행이 되었으며, 심지어 그들이 읽었던 책들은 일거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도대체 '시크릿 가든'의 그 무엇이 이런 어메이징한 신드롬을 낳았을까. 먼저 지목할 것은 김은숙 작가의 보다 편안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대본이다. 연인 시리즈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김은숙 작가가 '시크릿 가든'으로 다시 그녀가 잘 하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들고 왔을 때, 많은 이들은 "또 재벌집 아들 이야기야"하고 의구심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같은 신데렐라 이야기라도 전혀 다른 울림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을 김은숙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다.

'온에어'와 '시티홀'을 거치면서 김은숙 작가의 작품은 좀 더 의미가 깊어진 게 사실이다. 물론 시청률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었지만 '시티홀' 같은 작품은 멜로가 어느 정도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었고, 무엇보다 이 작가가 이제는 하나의 공간과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드라마가 어디 대중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결국 다시 멜로로 돌아왔지만 '시크릿 가든'은 그녀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그 편안한 세계 속에서도 충분히 새롭고 의미 있는 작품을 할 수 있었다.

'시크릿 가든'은 도시인들을 위한 동화다. 현대판 백마탄 왕자님은 김주원이라는 백화점 사장이고, 신데렐라이자 인어공주이자 앨리스인 길라임은 맹렬하게 온몸을 부딪쳐 살아가는 현대여성들을 표징하는 스턴트우먼이다. 드라마는 신데렐라, 인어공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고전들에서 모티브를 끄집어와 도시인의 동화로 재구성한다. 그것은 서로 다른 세계가 부딪치면서 때론 갈등하고 때론 공감하며 차츰 하나가 되어가는 그 과정을 그린다. 신데렐라와 인어공주의 왕자님과 공주들의 만남은 김주원과 길라임의 얘기로 들어와서는 때론 해피엔딩을 때론 새드엔딩을 예고하며 대중들을 울고 웃게 했다.

그리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영혼 체인지라는 마법적인 판타지로 재탄생되면서 내가 아닌 다른 나가 되고 싶은 욕망과 거꾸로 다시 나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의 변화를 이 계층도 성별도 다른 남녀를 통해 보여주었다. 이 일련의 고전들을 끌어들여 '시크릿 가든'이 그려낸 세계는 그래서 서로 다른 존재들이 서로를 겪어가며 갖게 되는 공감의 이야기다. '그 남자'는 '그 여자'가 되고, '그 여자'는 '그 남자'가 되는 그 과정은 계층으로 남녀로 구분되는 현대인들의 하나가 되고픈 판타지를 끄집어냈다.

무엇보다 이런 대본 속 캐릭터들을 완벽하게 연기해낸 현빈과 하지원, 윤상현과 김사랑을 비롯한 미친 존재감의 조연배우들의 연기가 있었기에 이런 세계의 구축이 가능해졌다. 현빈 없는 김주원, 하지원 없는 길라임을 상상할 수 없게 된 것은 그만큼 캐릭터와 일체된 그들의 연기 덕분이었다. 물론 이런 대본과 연기를 가장 아름답게 그려낸 신우철 PD의 연출도 빼놓을 수 없다.

명작은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장 익숙하고 가장 흔한 것 속에서 오히려 명작은 탄생한다. 그처럼 상투적인 삶이 우리네 일상이며, 작품은 그 상투적인 삶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시크릿 가든'은 그렇게 늘상 우리가 겪기 마련인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당신의 '그 남자', '그 여자'는 지금 어디에 있나. 그 평범해보여도 특별한 존재들은 어쩌면 바로 당신 옆에 있을 지도 모른다. 이런 인식이 바로 어메이징한 드라마 '시크릿 가든'이 우리에게 저지른 짓이다.

다름의 시선에서 같음의 시선으로

사랑해요. 고마워요. 그리워요. 보고 싶어요. 화면 속 가족들은 이역만리에서 고생하는 그들의 남편, 아빠, 아들에게 그 단순하지만 가슴을 울리는 마음을 전했다. 까르끼의 아내는 "정말 사랑해요. 여보 빨리 오세요."하며 환하게 웃어주었고, 예양의 아버지는 "우리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동생아 많이 보고싶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칸의 누나는 "너 먹는 것 많이 좋아하잖아. 그런데 우리가 해줄 수가 없구나"하며 말을 잇지 못했고, 쏘완의 아내는 "우리는 모두 잘 지내고 있다"며 "당신이 매월 보내주는 돈으로 우리는 잘 살고 있다"고 말했다. 아낄의 부모님은 "우린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하고 네가 보고 고 빨리 만나고 싶다"고 마음을 전했다.

그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시베리안 야생 수컷 호랑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역만리 떨어진 가족들을 담아온, 나영석 PD가 작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한 그 영상을 보며 외국인근로자 친구들은 눈물을 흘렸고, '1박2일' 출연진들은 그들의 눈물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늘 자신이 걷던 길,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눈가가 촉촉해진 부모님들을 보며 파키스탄에서 온 아낄은 서투른 한국말로 "가장 큰 선물 같아요. 작은 선물 아닙니다. 이거."라고 말했다. 그랬다. 그들에게 가족만큼 큰 선물은 세상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 화면으로 가족들을 확인한 외국인근로자 친구들이 그 그리움에 헛헛한 발걸음을 숙소로 옮길 때, 거기에는 새로운 기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꿈속에서도 그렸을, 화면 속에 있던 그 가족들이 거기 있었다. 유난히 덩치가 산만해 그 뒷모습이 유독 쓸쓸하게 보이는 까르끼가 그토록 보고 싶던 아내와 아이들을 보고는 온몸으로 흐느끼는 모습을 본 강호동은 결국 속절없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까르끼의 아내는 까르끼를 꼭 껴안고 마치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깍지를 낀 채, "같이 살자"는 말을 반복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칸의 노모는 볼을 맞댄 채 "우리 아들, 우리 아가"하며 눈물을 흘렸고, 파키스탄에서 온 아낄의 어머니는 '고생하는 아들'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들을 보며 은지원은 "못 알아들어도 무슨 말인지 다 알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장난기어린 눈시울도 붉어졌다. 미얀마에서 온 예양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릴까봐 차마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며 예양을 안고 있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캄보디아에서 온 쏘완은 수줍게 아내를 안아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왜 우리는 눈물을 흘렸을까. 거기서 우리 자신들의 가족들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그 뜨거운 인간애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외국인근로자 친구들과 함께 한 '1박2일'이 보여준 것은 그래서 공감과 공존이다. 피부색이 다르다고, 국적이 다르다고, 조금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고, 심지어 이제는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다르게 바라보던 그 차별적인 시선은 거기엔 없었다. 그들은 우리처럼 누군가의 가장이었고, 누군가의 사랑스런 아들이었으며, 누군가의 자랑스런 아버지였다. '1박2일'은 공감과 공존의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봄으로써, 차별에 대한 그 어떤 저항적인 외침보다 더 강한 울림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그래서 그 짧은 '1박2일'은 그 길디 긴 차별적 시선의 시간들을 단번에 뛰어넘은 기적의 순간이기도 했다.

이 땅에서 법의학 드라마를 한다는 것은

"CSI 같은 드라마 보고 멋있겠다 싶어 깝치는 부류를 보면 구역질난다." '싸인'에서 법의학자인 윤지훈(박신양)은 고다경(김아중)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이 대사에는 '싸인'이라는 드라마가 지향하는 바가 함축되어 있다. '싸인'은 'CSI'처럼 쿨하지도 않고, 또 쿨할 수도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 왜? 그것이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네 삶과 직결된 인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싸인'은 'CSI'가 보여주는 놀라운 과학의 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죽은 자의 인권'이라 생각하는 드라마다.

물론 'CSI'가 인권을 다루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만큼 우리네 법의학의 역사에서 인권의 문제만큼 화두가 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민주화 시대에 빈번하게 불거져 나왔던 의문사들, 그리고 권력과 연계되어 묻혀버린 죽음들이 여전히 우리네 공기에 흩어져 있는 상황에, 화려하게 꾸며진 연구실과 고가의 장비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물론 그런 과학적인 지원은 중요한 것이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 법의학은 법의학자들의 도덕적인 판단이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윤지훈과 이명한(전광렬)의 대결구도는 바로 그 점을 부각시킨다. 학교 분교를 재건축한 듯 보이는 초라한 남부지원의 윤지훈과, 'CSI'를 방불케 하는 화려한 장비와 시설로 무장한 이명한의 부검실은 확실한 대비를 만든다. 몇 백 억을 들여 만든 장비로 사체를 부검하고 사인을 분석하는 이명한은 그러나 차관의 방문에 더 신경을 쓰는 반면, UV조명장치가 없어 노래방 조명을 떼다가 사인을 분석하는 윤지훈은 온통 사체에만 집중한다.

인권의 사각지대처럼 여겨져 온 강압수사가 횡행하던 시절, '과학수사'는 모든 걸 투명하게 해줄 것처럼 여겨져 왔지만, 과연 과학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었을까. 문제는 과학이 아니라 법의학의 기본정신인 인권을 다루는 법의학자들의 도덕성이다. 그래서 '싸인'은 'CSI'처럼 쿨하지 못하다. 보험금을 받기 위해 한 가장이 저지른 자살을 '과학적으로' 규명해내는 것보다, 그 가장이 왜 그런 자살까지 시도하면서 가족들을 챙기려 했는지에 더 주목한다. 윤지훈이 그 가족을 찾아가 안타까운 사정을 설명하는 장면은 'CSI'와는 다른 '싸인'이란 드라마의 정체성을 잘 말해준다.

혹자는 미드와 비교하며 왜 '싸인'이란 드라마가 쿨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관계에 집착하는지 의아해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우리네 사회 속에서 법의학이라는 소재를 다룰 때 가져야 되는 태도다. 과학보다 중요한 건 인간관계이고, 정의에 대한 신념이다. 그래서 윤지훈이 있는 남주지원의 인물들은 전문가들의 집단이라기보다는 가족 같다. 윤지훈의 부검결과를 번복하면서 옷을 벗고 떠난 전 국과수 원장 정병도(송재호)가 윤지훈의 아버지 같은 인상을 주는 건 그 때문이다.

또 윤지훈이라는 캐릭터가 어떤 천재적인 능력을 보유한 인물로서 그려지지 않는 점도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의 메시지 속에서 윤지훈이라는 캐릭터는 능력보다 신념이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화려한 기술보다, 냉철한 판단력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인물이어야 한다. 그것이 설령 드라마라고 하더라도, 이 땅에서 법의학에 접근하는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시크릿 가든'의 엔딩, 새드일까 해피일까

노트에 비가 올 날짜를 적고,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모습을 그대도 똑같이 봤으면 좋겠다고 편지를 쓰는 김주원(현빈)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시리게 만든다. 그는 뇌사 상태에 있는 길라임(하지원)과 영혼 체인지를 통해 그녀를 살리고 자신이 대신 죽으려 한다. 저 앞에서부터 밀려오는 검은 구름과 섬뜩하게 내리치는 번개. 그 속으로 길라임과 함께 차를 몰고 달려 들어가는 김주원. 비가 오기 직전, 하늘이 어둑해지고 쿠르릉 천둥소리가 울리는 그 전조만으로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처럼, '시크릿 가든'은 어떤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전조의 드라마'다.

사실 이 전조는 첫 회에서 길라임이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는 스턴트우먼으로 등장했을 때부터 이미 예고된 것이다. 왜 하필 스턴트우먼인가. 이런 질문을 던져본 시청자라면 그 직업이 갖는 위험성에 앞으로 그녀에게 벌어질 사고의 전조를 예감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스꽝스럽게 시작된 영혼 체인지라는 상황 역시 후반부에 김주원이 빗속을 뚫고 뛰어드는 장면의 전조가 된다. 두 사람의 영혼이 서로 묶여버리는 이 상황이 주는 코믹한 스토리들은, 그 영혼 중 하나가 죽음 앞에 서게 되면서 순식간에 비극으로 돌변한다.

이 희비극을 넘나드는 사랑의 이야기 역시, 김주원이 길라임을 만난 뒤, 자꾸만 자기 주변을 서성대는 길라임의 잔상을 느끼는 장면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지만 거기 분명히 늘 존재하는 그녀. 그것은 축복이면서 비극적이다. 그리고 이건 사랑의 본질이다. 사랑은 기억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영원히 물질적인 세계에 남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후반부에 길라임 대신 뇌사에 빠졌던 김주원이 깨어난 후, 엘리베이터 사고 이후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건 이 드라마가 결국 가야됐던 숙명처럼 여겨진다. 그들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분명 만났던 것 같은 기시감은 있지만, 마치 처음처럼 시작되는 사랑같이.

'시크릿 가든'의 엔딩에 쏠린 지대한 관심과 다양한 해석들은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 때문이지만, 또한 이 드라마가 '전조의 드라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언가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역력한데다, 그 벌어지는 사건이 늘 시청자들이 기대했던 어떤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도 아니다. '한 발 다가가면 두 발 도망가는' 김주원과 길라임의 관계는 핑크빛으로 물들다가 핏빛으로 변하는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인다. 그러니 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스토리에 언뜻언뜻 보이는 전조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엔딩은 그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다.

아마도 이 사랑스런 커플의 해피엔딩을 요구하는 건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통상적인 해피엔딩은 자칫 이 드라마가 구축해온 세계를 훼손할 수도 있다. 이 드라마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늘 그러하듯, 결혼에 골인하고는 "그래서 왕자와 신데렐라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그런 스토리를 그리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자와 신데렐라가 만나 완전한 소통에 이르는 길, 그래서 궁극의 행복에 도달하는 그 과정을 그리려 한 것이 '시크릿 가든'이다. 영혼 체인지는 바로 그 역지사지의 과정을 겪기 위해 동원된 방법이 아닌가.

만일 김주원이 길라임에게 몸을 내주고 대신 뇌사 상태가 되는 것으로 결말을 맺었다면 어땠을까. 그것은 과연 새드엔딩일까. '타자가 만나 완전한 하나가 되는 길'. '시크릿 가든'이 추구하는 이 주제의식을 두고 본다면, 김주원의 몸에 길라임의 영혼이 깃든 상태는 반드시 새드엔딩이라 치부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 길라임의 영혼이 차츰 세월을 겪으며 김주원의 몸과 완전히 동화되어갈 때, 그들은 비로소 완전한 하나가 될 테니까.

물론 이 드라마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김주원을 살려내고 청년 시절의 기억으로 되돌려 다시 길라임과의 사랑을 이어간다. 도대체 어떤 엔딩이 최선이 될까. 양자가 서로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거나 결혼에 골인했다는 식의 통상적인 엔딩이 과연 최선일까. 아니면 충격적일 수 있지만 오랜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새드앤딩 속에서 어떤 긍정을 찾아내는 게 최선일까. 이 '전조의 드라마'는 엔딩에 대한 어떤 전조를 미리 보여주었을까. 귀추가 주목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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