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의 세상에 대한 일침, '별을 따다줘'

거침없이 상승하는 '별을 따다줘'의 그 힘은 어디서 나올까. 부모가 죽고 남겨진 다섯 동생들과 함께 거리로 나앉게 된 진빨강(최정원)의 그 눈물겨운 이야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가 보여주는 성장스토리 때문일까. 동생들과 함께 냉혈한 변호사 원강하(김지훈)의 집의 식모로 들어와 벌어지는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기묘한 동거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이 주는 유쾌한 웃음 때문일까.

아마도 이 모든 요소들이 이 착한 드라마의 원동력일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주는 진짜 묘미는 다른 곳에 있다. 냉혈한 원강하로 대변되는 어른들의 세상에 맞서는 '어린 아이 눈빛 공격(?)'이 그것이다. 자신의 영역에 그 누구도 들여놓지 않았던 원강하가 진빨강과 그 동생들을 조금씩 허락하게 된 것은, 그 아무런 사심 없는 아이의 눈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저씨가 제일 좋아요"하고 말하는 진파랑(천보근)의 그 순수한 눈은 원강하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낸다.

이 드라마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동화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비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즉 이 드라마에는 어른과 아이(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인물들)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 진빨강에게 늘 카드를 내주고 돈을 꾸어주면서도 오히려 그녀를 더 걱정하는 한진주(박현숙)나, 그녀와 함께 빨강을 도와주는 최은말(김지영)은 어른이지만 아이의 마음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다. 또 어딘지 부족한 듯 보이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우태규(이켠) 역시 덜 자란 아이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늘 냉정한 원강하를 비롯하여, 자신의 욕망에만 사로잡혀 있는 JK생명의 사장 정인구(김규철)와 그 아내 이민경(정애리), 그리고 그 딸인 정재영(채영인) 같은 인물들은 어른들의 표상이다. 그들은 물질적인 욕망에 빠져 사람을 보지 못하게 된 인물들로, 순수한 아이 같은 마음들을 견딜 수 없어 한다. 그것이 이미 어른이 되어 잃어버린 자신들의 순수했던 마음을 자꾸 반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원강하는 어느 날 불쑥 자신에게 찾아온 그 순수한 아이 같은 마음 때문에 흔들린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어딘지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괜스레 런닝머신 위에 올라 자신을 학대하는 그는, 조금씩 아이들에게 마음을 열어간다. 진빨강은 어른흉내를 내던 철없던 캐릭터. 그런 그녀는 동생들을 통해 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을 되찾고, 그것을 힘으로 다시 냉혹한 사회에 설 수 있게 된다. 진빨강과 원강하가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는 그 과정 역시 어른들의 세상에서 아이들의 순수함을 찾아가는 그 과정으로 보인다.

흔히들 세상에 가장 무서운 것이 자식들의 눈이라고 한다. 이 드라마는 그것의 확장판으로서 아이들의 무섭고도(?)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들여다본다. 이것은 동화의 힘이다. 그 순수한 세계를 읽을 때마다 나이든 우리가 현실 속에서도 자꾸만 잃어버렸던 어떤 것을 찾게 되는 것은 그 힘이 우리 마음을 흔들어놓기 때문이다. 참으로 지긋지긋한 어른들의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동화를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별을 따다줘', 이 아이 같은 제목을 가진 드라마가 힘을 발하는 것은 거꾸로 이 각박한 세상의 어른스러움을 말해주는 건 아닐까.

아이돌 그룹의 무대 밖 스토리 전략

연기자는 연기하고, 개그맨은 웃기고, 가수는 노래하고... 이젠 옛말이다. 연기자는 웃기기도 하고 개그맨은 연기를 하기고 하며, 가수는 웃기기도, 연기하기도 하는 세상이다. 예전에 가수들이 연기를 하면 ‘외도’라고 했지만, 이제는 다양한 ‘활동’이라고 한다.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졌고, 그들의 타 분야에 대한 도전의 자세 자체도 달라졌다. 무대 바깥에서 인기를 얻는 가수는 무대 위에서도 뜰 가능성이 높아졌다. ‘외도’가 ‘활동’이 된 상황. 무엇이 이런 변화를 만들었을까.

작년 소녀시대가 ‘gee'라는 노래를 들고 나와 말 그대로 이 땅의 아저씨들을 ‘ㅎㄷㄷ’하게 만든 데는 지금까지의 아이돌 그룹의 무대 전략과는 다른 무대 바깥의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었다. 소녀시대는 이미 일일드라마를 통해 중장년층에게 얼굴을 알린 윤아가 있었고, 라디오를 통해 그 털털함을 보여주었던 태연이 있었다. 사실 젊은 세대라면 모르지만 아홉 명이나 되는 소녀시대 멤버들이 펼치는 무대 위에서의 군무를, 나이든 세대들이 하나하나 친근감을 가지며 바라보긴 어려운 일이다.

만일 윤아나 태연 같은 이미 타 장르를 통해 친숙한 인물들이 없었다면 소녀시대의 군무는 그저 한 덩어리의 춤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한 덩어리로 보이던 군무 속에서 자신이 아는 몇몇 인물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저 애가 그 애였어?”하며 어린 딸과 쇼 프로그램을 보며 나누는 대화 속에는 묘한 공감대가 형성된다. 이후 소녀시대는 본격적으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무대 위에서 덩어리져 보이던 이미지를 각각의 개성 넘치는 인물들로 쪼개놓기 시작했다.

‘우리 결혼했어요’나 ‘일밤’, ‘무한도전’ 같은 버라이어티쇼에 출연하면서 수영은 개그맨 뺨치는 예능감을 보여주었고, 제시카는 얼음공주 같은 쿨한 섹시함을 과시했으며, 효연의 춤, 티파니의 가창력이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유리와 써니는 ‘청춘불패’에 정착하면서 무대 위의 섹시함과 귀여움과는 전혀 다른 수수함과 털털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타 분야에서 자신들의 개성을 뽐내던 소녀시대가 ‘오!(Oh!)'를 들고 무대 위에 오르자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 하나의 덩어리로만 보이던 무대 위의 소녀시대에게서 각각의 멤버들의 이야기들이 읽히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소녀시대의 활동이 폭발적인 것은 이 일 년 간 그녀들이 일궈 논 이야기 농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아이돌 그룹들의 ‘이야기 농사 전략(?)’은 소녀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2AM을 예로 들어보면, 과거 조권이나 임슬옹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약하기 전까지 이 그룹에 대한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았다. 2PM과 비교해보면 2AM은 거의 존재감이 없을 정도였다. 그것은 음악 장르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2PM은 파워풀한 음악과 퍼포먼스로 강렬한 무대를 연출했고, 심지어 짐승남이라는 이미지를 대중들에게까지 어필했다. 하지만 2AM의 발라드는 그 힘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발라드가 갖는 어딘지 가라앉는 분위기는 이들의 이미지까지 가라앉혔다. 하지만 조권의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깨방정은 이 이미지를 전복시킨다. 그러자 ‘죽어도 못 보내’로 다시 무대 위에 선 2AM에서 우리는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절절하고 진지하게 부르는 그 모습은 과거나 마찬가지지만,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얻어진 유쾌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갖고 무대 위에 오른 그들에게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그 깨방정을 부리던 친구들이 진지한 구석도 있네”하는 긍정적 이미지다. 즉 늘 진지해보여 어딘지 무거웠던 2AM의 이미지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각자 멤버들의 이야기 농사를 통해 어떤 균형감각을 갖게 되었다. 2PM이 무대 위에서의 이야기를 구성해냈다면, 2AM은 무대 밖에서의 이야기를 갖고 무대 위로 올라 성공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도발적인 무대 퍼포먼스에서 이제 우리는 ‘우리 결혼했어요’의 가인이 보여준 톡톡 튀면서도 어딘지 수줍은 소녀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고, ‘청춘불패’의 나르샤가 보여준 따뜻한 마음을 읽게 된다. ‘Bo Peep Bo Peep’을 부르며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티아라의 무대에서 우리는 ‘청춘불패’의 통편녀 효민, ‘공부의 신’에서 “서방”을 부르는 지연, 그리고 ‘천하무적 야구단’의 치어리더 소연을 보게 된다.

이것은 아이돌 그룹의 스토리 전략이다. 뮤직비디오가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그 비디오 한 편이 어떤 스토리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제 장르를 넘나드는 활동이 보편적인 것이 된 상황에서 가수들의 스토리는 무대나 뮤직비디오라는 테두리를 넘어선다. 이제 가수들은 저마다 무대 밖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일궈내고, 그것을 무대 위로 가져온다. 소녀시대의 ‘오!(Oh!)'가 과거 어느 때보다 친숙하면서도 폭발력을 갖는 이유에는 소녀시대가 그간 일궈온 바로 이 무대 밖의 이야기가 풍성하기 때문이다. 이제 가수들은 외도(?), 아니 무대 밖에서 활동할수록 뜨는 시대가 되었다.

소통의 쾌감에 충실한 영화, '하모니'

‘아바타’가 전 세계 영화시장에 던진 파장은 쓰나미급이다. ‘타이타닉’이 세웠던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갈아 치웠고, 우리나라에서 외화로서는 이례적으로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그러고도 그 기세는 꺾이지 않아 항간에는 국내 최고 흥행 기록인 ‘괴물’의 기록까지 갈아치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중국에서는 ‘아바타’의 질주를 의식한 나머지 3D로만 개봉하는 제재를 가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 정도니 우리네 영화들이 긴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바타’의 쓰나미에 몇몇 우리 영화들은 흔적 없이 쓸려 내려가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 영화들이 차례로 개봉되면서 조금씩 ‘아바타’의 영향권을 벗어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하모니’다. 이 작품은 그다지 언론을 통한 홍보가 많이 되지 않았지만 특유의 스토리가 갖는 입소문으로 대중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도대체 ‘아바타’와는 다른 그 무엇이 ‘하모니’를 버티게 해주는 것일까.

‘하모니’는 여러 모로 보나 작년 최고의 흥행작인 ‘해운대’를 닮았다. 윤제균 감독에 의해 제작된 이 영화는 먼저 각본이 ‘해운대’를 쓴 이승연과 윤제균에 의해 만들어졌고, 감독도 윤제균 밑에서 조감독으로 일했던 강대규가 메가폰을 잡았다. 물론 ‘해운대’처럼 쓰나미가 몰려오는 거대한 블록버스터는 없지만, ‘하모니’는 ‘해운대’의 그 쓰나미를 빼고는 거의 비슷한 톤의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각각의 사연들을 가지고 감방에 수감된 여죄수들. 그들의 이야기가 전면에 배치되어 제각각의 사연들을 들려주다가, 가족들을 앞에 둔 무대 위에 올라 하나로 묶여지는 하모니로 울려퍼지는 것은, ‘해운대’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이들이 쓰나미라는 거대한 사건 속에서 묶여 울림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이야기 구조다. 즉 ‘하모니’에서의 쓰나미는 바로 그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향해 쏟아내는 감동의 하모니가 만들어내는 쓰나미인 셈이다.

‘해운대’가 웃기고 울리는 것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볼거리의 블록버스터보다는 감정이입의 블록버스터에 더 치중했던 것처럼, ‘하모니’도 마찬가지다. ‘하모니’의 인물들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갖고 관객들을 웃기지만, 한 꺼풀 안으로 들어가 보면 모두 눈물 나는 이야기들을 갖고 있다. 순간적인 증오심에 죄를 짓고 감방에 들어왔지만, 그렇게 모여 한 방에 살아가는 그들은 유사가족을 형성한다. 그들이 더 끈끈해지는 것은 이 각자의 사연 속에서 뿔뿔이 흩어져 버린 가족들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모니’는 이 가족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하모니라는 점에서 공감과 소통의 쾌감을 주는 영화다.

‘하모니’를 굳이 ‘아바타’ 같은 작품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주는 감정의 질주가 여타의 멜로드라마나 휴먼드라마와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하모니’가 주는 감정이입은 저 '해운대'가 그랬던 것처럼 울다가도 웃음을, 또 웃다가고 울음을 터뜨리게 할 정도로 속도감이 있다. 작품의 메시지를 위해 머뭇거리거나 하는 지점을 이 영화에서는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장르와 영화가 주는 즐거움(웃음뿐만 아니라 눈물까지)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충실함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하모니’를 우리는 굳이 ‘작품’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또 혹자는 이를 ‘해운대’에서처럼 신파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가 주는 기능적인 측면을 두고 말한다면 ‘하모니’는 ‘아바타’처럼 충분한 즐거움을 주는 상업영화라고 할 수 있다. ‘아바타’가 보편적인 이야기가 갖는 공감 위에 세워진 새로운 세계에 대한 신기한 볼거리의 블록버스터라면, ‘하모니’는 가장 보편적인 가족의 이야기를 절절하게 호소하는 감정이입의 블록버스터라고 할 수 있다.

‘아바타’는 물론 현 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말하게 만드는 그런 영화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모니’ 같은 우리 이야기가 갖는 강점들이다. ‘아바타’에 대처하는 ‘하모니’의 자세를 통해, ‘아바타’가 가진 쿨한 볼거리만큼 중요한 것이 감정을 이끌어내는 정서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영화의 본질이 어떤 소통의 쾌감이라고 한다면, '하모니'는 바로 그 쾌감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무한도전'의 패자 없는 경기가 말해주는 것

도전하는 그들에게 패자가 있을까. '무한도전'이 복싱 특집편에서 다룬 WBC 세계 챔피언 최현미 선수와 도전자 쓰바사 선수의 경기에 패자는 없었다. 세계 챔피언이지만 스폰서도 없고 심지어 다음 경기를 잡지 못해 챔피언 벨트를 내줘야 할 위기(6개월 안에 방어전을 치르지 않으면 반납한다고 한다)에 있는 최현미 선수. 그리고 역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밝은 모습으로 꿋꿋이 복싱을 하고 있는 쓰바사 선수. '무한도전'은 두 선수의 명승부를 보여주었지만 승패의 결과는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이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경기를 통해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최선의 경기를 다한 선수들은 이미 모두 승자였다.

이 패자 없는 경기를 보여준 '무한도전'은 승패에만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던 권투 경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전해주었다. 일본까지 날아간 정형돈과 정준하는 쓰바사 선수 역시 최현미 선수만큼 속 깊은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프로그램은 모두 힘겨운 상황에서 도전하고 있는 이 두 선수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게 조명했다. 경기 전 좋은 경기를 보여 달라는 격려의 말은 물론이고, 경기가 끝난 후에도 쓰바사 선수의 라커룸을 찾아가 앞으로도 계속 응원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권투 경기, 그것도 한일전이라면 무조건 우리가 이겨야만 된다고 입을 모았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무한도전'의 풍경. 경기가 끝나고 쓰바사 선수의 멍든 눈을 보며 정형돈이 울먹거리고, 길이 끝내 눈물을 흘린 것은 왜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권투라는 경기가 갖고 있는 그 처절함과 힘겨움을 가까이서 바라보고는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도 링 위에 올라가는 그들에게는 더더욱.

흔히들 권투를 삶과 비교하곤 한다. 우리는 늘 아침에 세상이라는 링에 올라가 한바탕 힘겨운 경기를 치르고 다시 링 아래로 내려오는 삶을 반복한다. 링이라는 사회가 던져놓은 무대 위에서 우리는 늘 승자 혹은 패자가 되지만, 사실 링 밖으로 내려오면 누구나 누군가의 남편, 아내이거나 누군가의 부모로서 승자나 패자는 있을 수 없다. '무한도전'이 패자 없는 경기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바로 이 링 바깥의 시선으로 링 위에 오르는 두 선수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봅슬레이 특집이나, 복싱 특집처럼 이제 '무한도전'은 사회적인 관심이 미치지 않는 곳에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 프로그램이 과거와는 조금 결을 달리하는 새로운 도전과제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무한도전'의 멤버들은 이제 초창기의 그 낮은 위치에 서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은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서 스스로를 성장시켜 이제는 정상의 위치에 서 있다. 이것은 '무한도전'의 도전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무한도전'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지는 이 위기를 넘어서게 해준다. 팀원들의 성장에서 이제는 타인의 성장으로 '무한도전'이 도전하는 과제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무한도전'의 기치는, 승패가 아닌 그 최선을 다하는 것에 대한 도전의 가치를 보여줌으로써 공감을 자아냈다. 이제 '무한도전'은 그 최선을 다하는 자들을 찾아가 어깨를 두드려주고 있다. 그곳에 승자나 패자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사회를 흔히들 승자들이 모든 것을 다 차지하는 이른바 '승자독식사회'라고 한다. '무한도전'이 감동을 주는 것은 이 승자독식사회에서 패자 없는 사회를 꿈꾸기 때문일 것이다. '무한도전'에 패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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