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존자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 우리가 제대로 아는 건 없었다

나는 생존자다

“이런 사고가 나게 되면 늘 보상이 먼저 나와요. 보상이. 생명 앞에 돈을 이야기하고.. ‘돈을, 보상을 잘해 줄게’, ‘돈 때문에 너희들 그러지?’ 이 한마디에 그냥 다 무너져 내리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나는 생존자다>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유족의 이야기는 못내 아프다. 그건 삼풍백화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참사를 대하는 경박하고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를 콕 집어내고 있어서다.

 

사실상 원인이 분명히 있는 인재지만, 마치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천재인 것처럼 취급하고 그래서 그 진상을 규명하기보다 서둘러 보상 이야기를 꺼내며 돈으로 덮어버리려 하는 듯한 천박한 행태들이다. 그건 삼풍백화점 유족이 눈물을 꾹꾹 삼키며 피처럼 토해놓는 말처럼, 그들이 먼저 보낸 가족으로 이미 헐어버렸지만 애써 버텨내려 했던 삶의 옹벽을 또 한 번 무너뜨리는 일이다. “금전으로 목숨을 대신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나는 신이다>로 사이비종교의 추악한 민낯을 적나라하게 꺼내놓음으로써 사회적 충격과 파장을 일으켰던 조성현 PD가 그 후속편으로 <나는 생존자다>를 내놨다. 총 8회로 형제복지원, JMS, 지존파 그리고 삼풍백화점을 다뤘다. 전작에 비해 유사한 사건들로 묶이지는 않지만, 대신 조성현 PD가 하나의 연결고리로서 들여다본 건 제목에 담겨있는 것처럼 ‘생존자’라는 키워드다. 그저 피해자가 아니라, 살아남은 이들이고 그 후에도 여전히 생존의 고통스런 삶을 버텨내며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에서 ‘생존자’다.   

 

당시 끔찍했던 사건들을 실제와 재연된 영상을 통해 꼼꼼히 그 진상을 담아내면서도, 생존자들과 피해자 가족들의 절절한 인터뷰가 중심이 되어 이들의 여전히 끝나지 않은 고통의 삶을 전한다.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 나이에 아무 것도 모르고 경찰에게 붙잡혀 형제복지원이라는 지옥에 끌려 갔다 몸도 정신도 망가져 버린 채 현재까지도 그 시간에 멈춰 살아가는 생존자들이나, <나는 신이다>를 통해 교주 정명석의 성범죄를 용감하게 폭로했지만 그로 인해 생명의 위협까지 받은 메이플이나 조성현 PD, 또 지존파에 의해 살인 공장에 납치되었다가 9일 간의 사투 끝에 도망쳐 살아 남았지만 그 지독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생존자, 그리고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삼풍백화점 붕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과 유족들... 

 

<나는 신이다>가 숨겨진 사실을 꺼내놓는 폭로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나는 생존자다>는 이들의 고통을 들여다보면서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구조적인 접근도 빼놓지 않았다. 거의 홀로코스트에 가까운 형제복지원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그 폭력을 주도한 박인근 원장이 미미한 처벌을 받고 그 가족들이 지금도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 건 당시 이 사건이 군부독재의 비호 아래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사건이 공개됐지만 제대로 된 진상규명 없이 유야무야 처리된 것. 

 

그렇다면 군부독재의 시대를 지난 현재까지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사죄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건 무얼 뜻하는 걸까. 과거의 잘못과 선을 긋지 못하는 현 정부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일까. 어쩌면 당장의 현실과 이익에만 집중하다 그런 일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생존자다>는 그것이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생존자들과 유족들이 고통스런 싸움을 하고 있는 현재의 일이라는 걸 보여준다.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를 요구하는 생존자에게 비웃음을 던지는 가해자들이 존재하는 한 이건 결코 과거의 일이 될 수 없다고 이 다큐멘터리는 말하고 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만 나아가라는 한국 사회의 강령은 개발시대 이후 끝난 게 아니라 아직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잘 사는 것, 부유해지는 것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가장 큰 가치로 여기는 그 풍조가 형제복지원, JMS, 지존파, 삼풍백화점 사건을 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이다. 사건으로 발현된 증상은 저마다 달라 보이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원인은 강박에 가까운 돈과 성공, 성장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존자다>가 삼풍백화점 참사를 다룬 마지막 회의 부제가 ‘돈으로 쌓은 탑’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보다 많은 수익을 내려는 백화점 측의 무리한 설계 변경 요구가 있었고, 이를 허가하는 대가로 뇌물을 받은 공무원들이 있었다. 또 들어가야 할 철근을 빼돌린 부실공사가 있었고, 붕괴될 위험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화점 영업이 인명보다 중요하다 여긴 경영진들의 무책임이 있었다.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건 결국 ‘돈’이다.

 

형제복지원과 경찰이 공조해 무고한 아이들까지 잡아간 데는 더 많은 국가보조금과 뇌물이 있었고, JMS의 정명석이 감옥에 수감된 이후에도 이 사이비 교단이 계속 유지된 데는 2인자 정조은의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 지존파의 엇나간 폭력의 이면에도 양극화된 돈에 대한 박탈감이 존재했고, 삼풍백화점 붕괴에는 보다 많은 이윤을 남기려 무리한 설계 변경까지 하려 했던 경영진과 뇌물을 받고 이를 무마해 준 공무원들이 있었다.  

 

그러니 가족을 잃고 절망하는 유족들에게 먼저 보상 이야기를 내놓는 건 돈이면 뭐든 다 된다고 믿는 여전한 돈 지상주의적 발상이 아니고 뭘까. 그래서 그런 비극을 과거로 빨리 밀어내고 앞으로만 가려는 행태는 광주 아파트 외벽 붕괴사고 같은 또 다른 삼풍백화점의 비극이 반복되는 이유다. 사실 생존자나 유족들도 그 끔찍했던 당시 사건들에 대해 인터뷰를 하는 건 고통 그 자체다. 그럼에도 왜 인터뷰에 응하게 됐는가를 묻는 조성현 PD의 질문에 한 유족은 이렇게 말했다. “이게 이렇게 안하면 잊어요. 우리 대한민국 사람은. 잊기 때문에 널리 좀 퍼지게 해주세요. 수고스러워도.” 그러니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우리 역시 이 사건들을 눈 부릅뜨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잊지 않기 위해서, 또 다시는 이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아야 하므로.(사진:넷플릭스)

'우리영화', 끝이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삶, 작품

 

우리 영화

 

SBS 금토드라마 '우리영화'는 '하얀사랑'이라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담은 드라마다. 

'하얀사랑'은 시한부 규원과 현상의 사랑과 이별을 담았고, 그 규원 역할을 실제 시한부인 이다음(전여빈)이 맡았다.

그 작품을 찍는 감독 이제하(남궁민)는 영화를 찍으며 이다음을 사랑하게 되고, 그 작품 속 시한부 규원의 마음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영화'의 엔딩신은 이제하와 이다음에 의해 원작과는 달라진다. 

 

파도가 부서지는 바닷가를 배경으로 찍은 엔딩신에서

규원 역할을 빌어 이다음이 극중 남주인공인 현상에게 건네는 말은

이제하에게 그대로 와 닿는다. 

 

"현상씨 들려요? 끝도 없이 부서지는 소리."

"응. 들려."

우리 영화

"이제하는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꼭 알려주고 싶었어요."

"어, 알아. 나는 행복해질 수 있어. 다음씨가 알려줬잖아."

우리 영화

"제하씨는 제하씨의 시간을 살아줘. 아주 행복하고 충실하게. 나는 여기에 머물러 있을게. 제하씨 마음에 그리고 이 바다에도."

우리 영화

"응. 다음씨는 여기 있는 거야." 

"응. 나는 이렇게 부서지고 다시 생기고 부서지고 다시 생길 거니까."

 

부서지지만 다시 생겨나는 포말처럼

이다음은 계속 그 곳에 있을 거라고 한다. 

그건 이제하의 기억 속에, 그가 이다음과 함께 찍은 '하얀사랑'이라는 영화 속에 있겠다는 거다.

 

앞으로 이제하는 이다음 없는 세상에 남겨지겠지만

어느 파도 앞에서

또 언제든 다시 틀어 볼 수 있는 영화 속에서

이다음이 다시 생겨나고 부서지고 또 생겨나는 걸 볼 것이다. 

 

계절이 그렇고, 그 계절 맞아 피었다 금세 떨어지는 꽃잎이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지는 꽃잎을 애써 주머니에 한웅큼 집어 넣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떨어진 꽃잎도

계절이 오면 다시 피어나고 또 떨어진다.

 

우리 삶이 그렇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 같은 작품을 애써 만들려는 마음도 그 삶을 애써 반복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우리 영화. 우리 삶.

사라져도 영원히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반복될...

 

우리영화

'새글들 > 나를 울린 명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러니까... 그건 쨉도 안돼."  (0) 2025.09.16
첫, 사랑, 사람, 삶  (2) 2025.08.07
골이 아니야, 트라이지  (4) 2025.07.31
넌 실수가 아니야  (1) 2025.07.28
사람들이 왜 너를 못 알아볼까?  (1) 2025.07.23

‘검은 태양’이 보여주는 조직의 비리 청산 그 어려움

검은태양

“그날 네 동료들을 죽인 건... 한지혁 바로 너야!” MBC 금토드라마 <검은 태양>에서 영상 속 한지혁(남궁민)은 그렇게 말한다. 국정원 임원들이 긴급 소집되어 있었고, 한지혁과 국정원 국내 파트 1차장 이인환(이경영)이 대치하던 상황이었다. 그 영상 속 한지혁의 말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 특히 1년 전 중국 선양에서 동료들을 죽인 자와 이를 사주했을 국정원 내부 배신자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한지혁은 더더욱 충격에 빠졌다.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에게 미리 찍어뒀던 영상을 순차적으로 보내 그 진실을 알린다. 바로 이런 장면은 <검은 태양>이라는 서사가 가진 특이한 지점이다. 국정원이 등장하고 중국에서 벌어진 공작들이 초반에 펼쳐져 애초에는 <아이리스> 같은 전형적인 스파이물처럼 보였던 게 사실이다. 또 항간에는 기억을 찾아가는 <본> 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밀항선에서 마치 지옥에서 돌아온 괴물의 형상으로 1년 전의 기억을 모두 잃은 채 한지혁이 등장하는 강렬한 장면은 그래서 다소 뻔한 스토리로 흘러가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 섞인 기시감조차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과거의 한지혁이 미리 찍어 자신에게 보낸 영상으로부터 차별화된 서사의 변곡점을 찍는다. 한지혁은 국정원 내부의 적폐세력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그들의 실체를 찾아가기 위해 돌아온 것이었다는 것. 드라마는 스파이 스토리가 아닌 추리극 형태로 바뀌었고, 한지혁이 그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국정원의 갖가지 비리들이 등장한다. 민간인 사찰, 대선 개입, 갖가지 간첩 조작사건 등등, 이미 우리에게 충격을 줬던 실제 국정원 비리들이 드라마 속 서사 속에서 얼굴을 내민다.

 

국정원 적폐세력의 몸통으로서 실체를 드러낸 인물은 바로 이인환이다. 그는 국정원 국정원이 선거 개입 등을 위해 민간인을 사찰했던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던 인물이다. 그는 이 여론을 뒤집고 선거 판도를 바꾸기 위해 ‘북풍’을 활용하려 한다. 북한 고위간부인 리동철의 망명을 계획한 것. 하지만 이 계획이 틀어지자 사건을 덮기 위해 모두를 제거한다. 그리고 그 후에도 이인환은 상무회를 통해 아르고스라는 비밀조직을 움직이고(과거 기업 플래닛이 해왔던 개인 정보 수집 선거 개입 등의 활동을 하는 것) 그것으로 정권에 휘둘리지 않는 힘(권력)을 가지려 한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우린 죽어서도 음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라는 거지. 내가 지금까지 이 조직에 있으면서 몇 명의 원장을 모셨는지 아나? 21명이야. 정권이 8번 바뀌는 동안 자그마치 21명의 원장이 손님처럼 여길 다녀갔어. 그리고 그들은 매번 우리 원이 자신들에게 충성하기를 바랐지. 선거에 개입하고 여론을 조작하고 사람들을 사찰하라고 지시했어. 그리고 사라져버렸지. 그 오명들을 모두 우리에게 뒤집어씌운 채! 근데 설명할 수도 변명할 수도 없었어. 그저 침묵해야만 했어. 그게 우리 숙명이니까.”

 

실체를 알게 된 한지혁을 마주하게 된 이인환은 자신이 왜 이런 일들을 벌이게 됐는가에 대한 이유를 그렇게 설명한다. 국정원이 그간 정권에 의해 갖가지 비리와 범죄를 저지르면서까지 이용되고, 사건이 터졌을 때도 결국 그 오명은 시킨 자들이 아닌 국정원이 뒤집어썼다는 것. 그렇지만 그걸 설명하거나 변명할 수도 없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이인환은 결국 이 모든 문제가 ‘힘’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휘둘릴 게 아니라 더 큰 힘을 갖는 독자적인 조직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거기 편승했던 건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한지혁의 말처럼 이인환이 하려는 짓은 저들과 다르지 않다. 결국 이 독자적인 조직으로서의 힘을 갖기 위해 그는 여러 동료들마저 죽음으로 내몰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건, 이인환 같은 악의 실체가 드러났다는 점이 아니라 그 뒤에 존재하는 검은 세력들(그건 아르고스 같은 사조직이 될 수도 있고 국정원의 힘을 이용해온 정권일 수도 있다)이 어떤 짓들을 해왔는가 하는 점이다. 

 

어찌 보면 이러한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중차대한 사건들을 수사하고 그 진실을 파헤치며 비리와 적폐를 청산하는 일이야말로 국정원이 본래 해야 될 일들이다. 하지만 명령 체계로 운용되는 조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심지어 조직의 안위를 위해 같은 동료들에게도 총구를 겨누게 만든다. 한지혁 또한 그런 희생양이 됐던 인물이고, 유제이(김지은)의 아버지라 여겨지는 백모사(유오성)도 스스로 말했듯 한지혁과 비슷한 일들을 겪은 인물이다. 

 

앞서도 말했듯 <검은 태양>이 여타의 스파이액션과 차별화되고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과거의 자신이 무슨 이유에선지 기억까지 지워버린 후 자신을 국정원 안으로 보냈다는 사실이다. 그는 순차적으로 과거에 미리 찍어둔 영상을 현재의 자신에게 보내면서, 마지막 영상을 보기 전 반드시 국정원 내 배신자를 찾아내라고 강변한다. 결국 그 배신자는 이인환으로 드러나지만, 놀랍게도 동료를 죽인 진범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마지막 영상 속 진술을 마주한다. 

 

그렇다면 한지혁은 왜 이렇게까지(기억까지 지운 채) 하면서 국정원 내 배후세력을 찾아내려 했던 걸까. 그것은 거꾸로 기억을 모두 가진 채 국정원 내부의 적폐와 대결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에둘러 말해준다. 조직원으로서 조직의 적폐를 척결하는 일이 ‘기억까지 지울 정도’가 아니면 어려운 일이라는 걸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스파이물처럼 보였던 <검은 태양>은 그래서 뒤로 갈수록 현실감을 드러낸다. 실제 2016년 국정원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갖가지 사건들이 이 드라마가 탄생한 이유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 매 대선 정국 때마다 북풍에서부터 시작해 댓글 조작 같은 방식으로 여론을 좌지우지하려 했던 조직이 있었고 거기에는 이들을 이용하려는 정권 또한 존재했다는 걸 <검은 태양>은 저격하고 있다. 그래서 국정원 스스로 적폐 청산을 하고 새로운 조직으로 탄생하겠다 선언한 그 변곡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과연 <검은 태양>처럼 국정원은 그 조직이 쇄신되고 있을까. 다가오는 대선은 어쩌면 이를 가름하는 시간이 될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검은 태양>을 본 시청자들이라면 다가오는 대선에서 혹여나 벌어질 지도 모를 어떤 사건들조차 이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될 테니 말이다.(사진:MBC)

"걱정 마, 사랑해, 고마워", '너를 만났다', 다시 만난 아내에게 남편이 한 말들

 

"잘 있었어? 잘 있었어? 이제 안 아파? 이제 안 아파?" 4년 전 떠난 아내를 VR기술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된 남편 김정수씨가 가장 먼저 한 말은 그것이었다. 그건 아마도 아내가 떠난 후 김정수씨의 가슴에 묵직하게 남아있던 말이었을 테고, 끝내 전해주지 못했던 말이었을 수도 있었다. 아내는 아픈 모습으로 그와 다섯 아이들을 남긴 채 떠났으니. 

 

MBC VR휴먼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 시즌2의 부제는 '로망스'였다. 떠난 아내를 찾아가는 '모험'이자, 그 과정에서 발견하게 되는 남편과 아이들의 아내와 엄마에 대한 가슴 뭉클한 사랑의 이야기. VR이라는 어찌 보면 차갑게 느껴지는 기술이 '휴먼'이라는 뜨거운 감정을 만나 눈물로 녹아내리는 순간을 <너를 만났다>는 보여줬다. 

 

가상으로 다시 만나게 된 아내 앞에서 김정수씨는 울먹이며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아내의 얼굴이 얼마나 만지고 싶었을까. 하지만 마치 손대면 작은 빛이 되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그런 마음이 그 떨리는 손끝에서 느껴졌다. 

 

아이들은 VR기술로 아빠가 엄마를 다시 만난다는 사실을 방송국에 와서도 실감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가상 스튜디오에 들어간 아빠가 똑같이 가상으로 재연된 집에서 "지혜야"라고 엄마 이름을 부르며 찾아다닐 때 드디어 실감했다. 첫째부터 막내까지 오남매가 눈물을 흘린 건, 엄마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만큼 엄마를 그토록 간절히 부르는 아빠의 마음에서 느껴지는 깊은 사랑과 그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얼굴을 마주보며 "살 빠졌다" 안타까워하고, 음악을 틀어 놓고 양손을 잡은 채 천천히 함께 춤을 추는 부부. 춤의 끝자락에 조용히 다가와 남편의 품에 고개를 안긴 아내. 김정수씨는 그 작은 동작에서도 아내의 사랑을 느꼈다. "사랑해줘서 고마워. 지혜야." 

 

그렇게 안은 채 그들이 가상으로 찾아간 곳은 오대산 월정사 근처의 숲길. 아파서 운신하기 힘들었을 때도 아내와 함께 갔던 곳이었다. 함께 숲길을 걷고 돌 하나씩을 얹어 놓고 소원을 비는 부부의 데이트. 그 모습을 밖에서 보는 첫째 딸 종빈은 환하게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바랐던 건강한 모습의 엄마가 거기 있었고, 그렇게 아빠를 만나고 있어서였다. 안 아픈 엄마를 바랐던 딸이었다. 

 

함께 벤치에 앉아 아내가 문득 생각났다며 말한다. "나 아플 때 남한테 안 맡기고 오빠가 다 해준 거." 아내의 그 말이 가상으로 재연된 건 아마도 첫째 종빈과의 인터뷰를 통해 듣게 된 내용 때문이었을 터였다. 늘 아빠가 엄마 옆에 있었다는 종빈이는 엄마가 수술하고 배변주머니를 바꿔주고 하는 일들이 힘들었을 텐데 아빠가 그렇게까지 간호를 할 수 있었다는 데 놀라워했었다. 그것이 사랑의 위대함이라는 걸 종빈이는 느끼고 있었다.

 

"지혜야. 내가 들리는 거 없었고 네가 보이지 않아도, 항상 3년 동안 나하고 애들 옆에 있었다는 거 내가 알아." 그렇게 말하는 남편에게 아내가 돌탑 쌓으며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묻는다. "우리 지혜 아프지 않고 하늘나라에서도 아프지 않고 하고 싶은 거 다할 수 있도록, 수영하고 싶은 거 수영하고 꽃꽂이하고 싶은 거 꽃꽂이 하고, 반찬 만드는 거, 음식 만드는 거 좋아하는 거 계속하면서, 이제 여기 걱정하지 말고 잘 있으라고. 오빠 가면 애들한테 있었던 일 다 빠짐없이 얘기해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이제. 애들 다 잘할 수 있다고 오빠도 이제 괜찮고. 용기내서 할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는 오히려 떠난 아내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누차 말하고 있었다.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중에 다시 만나면 다 해주겠다는 그 말에 아이들도 눈물을 흘렸다. 아내는 말했다. "우리 빈이, 윤이 지금 사춘기인데 힘들 때 엄마 생각 마음껏 해도 된다고." 종빈이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힘들 때만 엄마를 찾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고 말한 바 있었다. 종윤이는 독감 걸렸을 때 그러면 안되는데도 엄마를 찾아 안았다며 그게 좋았다고 말했었다. "인이, 원이, 혁아. 너희에겐 사랑하는 엄마가 있어. 알지?" 엄마의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아이들 기억 속에는 언제고 엄마가 살아있을 테니.

 

마지막 인사를 하고 아내가 작은 빛이 되어 떠난 후에도 김정수씨는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아쉬운 시간이었지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후련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스튜디오로 들어온 아이들. 다소 어색한 듯 애써 웃으며 들어오던 아이들은 그러나 아빠에게 달려와 그 넓은 품에 안겨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울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제 엄마도 있었다. 그 따뜻한 엄마의 기억들이 함께 하는 한.(사진:MBC)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