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왕>, 수애는 왜 그저 악녀로 전락했을까

 

<야왕>의 주다해(수애)는 왜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이나 <하얀거탑>의 장준혁이 되지 못했을까. 이들 캐릭터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어떻게든 성공하려는 강력한 욕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 욕망은 비뚤어진 것이어서 이들은 모두 악역을 자처하지만 그렇다고 그 악역이 모두 비난받는 건 아니다. 미실은 악역이면서도 자신만의 현실적인 통치 철학을 보여줌으로써, 또 장준혁은 잘못된 선택을 하지만 그 역시 사회라는 경쟁 시스템 속에서의 희생자라는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그 죽음에 이르러 시청자들을 고개 끄덕이게 한 인물들이다.

 

'야왕'(사진출처:SBS)

하지만 <야왕>의 주다해는 다르다. 그녀에게는 일말의 동정적인 시선이 사라져버린 전형적인 악녀에 머물러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다. 첫 등장에서 죽은 어머니 사체 옆에 넋 나간 표정으로 앉아있던 모습은 이 가정폭력과 가난에 시달리는 여인이 앞으로 달려갈 욕망의 질주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 후 주다해의 모습은 줄곧 시청자들의 이해를 받기보다는 안쓰러울 정도로 성공에 집착하는 악녀로 일관되었다.

 

의붓아버지를 죽이고는 하류(권상우)를 공범으로 만들어버리고, 그렇게 그녀에게 헌신하는 사실상의 남편이었던 그를 배신하고 심지어 감방에 들어가게 한데다 딸까지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재벌그룹 아들 백도훈(정윤호)의 약점(사실은 그가 누나 백도경(김성령)의 딸이라는 사실)을 이용해 그와 결혼하고, 하류(대신 쌍둥이형인 차재웅이 죽게 되지만)의 살인을 사주한다. 이것도 모자라 백도훈마저 사경을 헤매게 만드는 전형적인 악녀, 그녀가 바로 주다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첫 번째는 스토리에 세계관이나 철학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즉 한 사람이 악녀가 되어가는 과정을 사회적인 맥락에서 바라보지 않고 그저 개인적인 차원으로 되돌리는 간편한 선택을 하기 때문에 주다해는 아무런 이해도 받지 못하는 인물로 전락했다. 결국 이것은 사회적인 시스템의 문제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모든 잘못은 주다해가 나쁘기 때문으로 귀결되어 버린다. 어린아이 같은 순진하고도 단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는 이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남녀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 때문이다. 즉 <야왕>이라는 작품에는 전형적인 남성 중심적 시각이 들어가 있다. 물론 선악구도로 나누어 놓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여성의 성공에 대한 욕망을 그 자체로 무언가 잘못된 것으로 여기는 시각이 존재한다. 남성은 당연히 성공을 꿈꾸어야 하지만 여성은 그러면 안 되는 듯한 관점. 이것은 주다해의 성공 욕구에 대한 근거를 제대로 제시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편한 시선이다.

 

이렇게 주다해라는 악녀가 시스템이 탄생시킨 괴물이 아니라 그 나쁜 심성 때문에 생긴 인물이 됨으로써 <야왕>은 그저 온전한 복수의 게임으로 전락된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때로는 마치 성공하기 위해 발악하는 여성과 그것이 무조건 잘못 됐다는 성차별적인 전제 하에 그녀를 막으려는 남성의 대결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만일 주다해를 좀 더 이해될 수 있는 악녀로 그렸다면 이 드라마는 훨씬 풍부한 관점을 가지면서 논쟁적인 이야기를 다룰 수 있지 않았을까.

 

그나마 주다해를 수애라는 어딘지 도도하고 믿음이 가며 그 자체로 동정심마저 유발하는 배우가 연기하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일 수애가 아닌 다른 연기자가 주다해라는 캐릭터를 연기한다고 생각해보라. 어쩌면 <야왕>은 그저 극악스럽기만 한 막장으로 굴러 떨어졌을 지도 모른다. 물론 이미 엉성한 얼개의 스토리는 막장에 가깝지만 그래도 연기자들이 그것을 연기로서 커버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연기자들이 갖고 있는 힘은 세계관이 부재한 허술한 <야왕>의 대본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보게 만드는 힘이다. 권상우의 연기가 그렇고 김성령의 연기가 그렇다. 물론 정윤호는 연기력 부족에다가 그저 바보가 되어버린 백도훈이라는 캐릭터의 한계 때문에 최악의 상황이긴 하지만.

 

<야왕>은 서로 상처주고 상처받는 게임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드라마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시각은 결코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없다. 사회적인 시스템의 문제를 발견하지 않고 그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태도가 그렇고,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여성 차별적 시선도 그렇다. <야왕>의 이 문제를 집약적으로 갖고 있는 인물이 바로 주다해다. 그 어떤 사회의 문제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온전히 태생적인 악녀가 되어버린 인물. 볼수록 안타까운 일이다.

무엇이 악동뮤지션과 방예담을 갈랐나

 

<K팝스타2>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두 팀을 고르라면 단연 악동뮤지션과 방예담이 될 것이다. 그런데 톱6가 결정되면서 이 두 팀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다음에서 진행된 누구의 무대가 제일 좋았느냐는 투표에서 악동뮤지션의 ‘크레센도’는 무려 71.5%가 지지해 1등을 차지한 반면, 방예담의 ‘I do'는 2.5%로 꼴찌로 랭크된 것. 물론 포털의 투표가 얼마나 공신력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대중들의 마음을 읽을 수는 있을 것이다.

 

'K팝스타2'(사진출처:SBS)

실제로 톱6 결정전에서 방예담은 그다지 좋은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음정은 떨렸고, 어딘지 자신 없는 듯한 목소리와 몸짓은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실 대중들은 이전부터 방예담에게 쏟아지는 심사위원들의 극찬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대중들이 TV로 보기에는 예쁜 목소리와 가능성을 가진 아이의 무대 정도라고 생각했던 데 반해, 심사위원들은 방예담의 무대만 보면 놀랍다는 표정을 연실 보여주었고, “천재” 심지어 “무섭다”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악동뮤지션에 대한 반응은 또 대중들과 심사위원이 정반대였다. 심사위원은 연거푸 대중성 부족을 들어가며 악동뮤지션의 부족한 면을 지적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중성의 장본인인 대중들은 투표를 통해 악동뮤지션을 지지했고, 또 자작곡이 발표(?)될 때마다 음원 차트 1위에 올라가게 만들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가진 특징(떨어질 것 같은 위기감을 보여주면 오히려 투표가 집중되는)이 있고 제작진이 어떤 운용의 묘를 발휘했다고 해도 악동뮤지션의 노래들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역력해 보였다.

 

무엇이 방예담과 악동뮤지션의 희비쌍곡선을 만들었던 것일까. 이 사례에서 보여지는 건 이른바 ‘칭찬의 역효과’라는 교육이론의 한 대목이다. ‘칭찬의 역효과’란 아이들(성인도 포함된다)에게 하는 칭찬이라는 것이 거꾸로 아이들에게 기대에 대한 부담감을 만들고, 또 과정 그 자체보다는 결과에 집착하게 만듦으로서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해가 된다는 이론이다. 한 마디로 칭찬을 많이 받은 아이는 바로 그 칭찬에 집착하게 되어 의존적이 되고, 더 모험적인 시도를 하기보다는 칭찬받을 수 있는 쉬운 시도만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

 

이 ‘칭찬의 역효과’를 통해 바라보면 방예담에게 그토록 쏟아졌던 극찬 세례는 사실상 그를 성장시켜주기보다는 오히려 가능성을 제한시켜버린 결과로 이어졌을 수 있다. 부담감은 점점 커졌을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칭찬만 받던 아이가 비판을 받았을 때는 그 상처도 더 클 수밖에 없다. 반면 악동뮤지션에게 유독 냉철했던 심사평들은 거꾸로 이들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시켰을 수 있다.

 

이렇게 ‘칭찬의 역효과’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면 앤드류 최가 어떻게 점점 안정적이고 꾸준한 무대를 선보일 수 있었는지가 보인다. 양현석이 얘기한 것처럼 앤드류 최는 사실상 그다지 큰 기대를 받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고, 적절히 받는 심사위원들의 조언들은 그대로 앤드류 최에게는 뼈가 되고 살이 되었을 것이다. 앤드류 최는 대단히 감미로운 목소리에 절정의 가창력, 게다가 풍부한 음악 경험까지 갖춘 <K팝스타2>의 무시 못 할 우승후보로 올라선 것이 사실이다.

 

흔히들 교육에 있어서 ‘당근과 채찍’이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사람은 당나귀가 아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조직관리라는 어찌 보면 비인간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칭찬보다 중요한 건 진심어린 조언이다. 특히 방예담이나 악동뮤지션처럼 어린 친구들에게는 지금 당장의 칭찬이 주는 달콤함(사실상 기대감과 부담감을 만드는)보다 진심어린 조언이 주는 자존감(구체적으로 어떤 걸 더 보완하면 더 나아질 수 있다는)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무도> 왜 하필 이 시기에 택시를 다뤘을까

 

<무한도전>과 택시의 만남. ‘멋진 하루’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만남에서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서민’이다. 하루 종일 일해도 사납급 채우느라 한 달에 130만원 벌기도 힘들다는 택시기사들의 조악한 현실. <무한도전>이 노란 제복을 입고 일일 기사로 나선 데는 그들의 힘겨운 실상을 이해해주고, 또 택시를 이용하는 대중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 때문일 게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실제 <무한도전>은 오전 내내 택시를 몰고 다녀도 승객만나기가 쉽지 않은 택시기사들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점심시간에 기사식당에 모여 돼지불백에 심한 허기를 느끼는 모습들이 포복절도의 웃음으로 승화되었지만, 그 장면은 사실 웃을 수만은 없는 택시기사들의 현실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점심 식사 한 끼를 챙겨먹는 것도 편안할 수만은 없는 현실을 극화해보여준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 <무한도전>을 보는 시선이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최근 벌어진 택시법을 둘러싼 택시업계와 버스업계 그리고 정부의 입장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과 겹쳐져 있다. 택시를 대중교통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대중들은 이중적인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힘겨운 택시기사들의 현실을 알고는 있지만, 또한 택시 하면 떠오르는 것이 승차거부, 난폭 운전 같은 부정적인 서비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택시업계와 버스업계의 대립은 만일 택시가 대중교통으로 인정이 됐을 때 그 혜택이 버스에게는 피해로 돌아올 수 있다는 시각 때문이기도 하다. 지원금이 줄어들 수 있다거나, 버스전용차로에 택시가 들어올 수 있다거나 하는 등의 불안감이 그것이다. 게다가 택시비가 워낙 비싸서 이를 대중교통으로 인정한다는 것에 대한 대중정서도 그다지 곱지만은 않다. 또한 택시법이 통과됐을 때 실질적으로 혜택을 가져가는 건 택시사업주들일 뿐, 택시기사가 아니라는 점도 이를 반대하는 대중들의 입장이다.

 

<무한도전>에서 유재석의 택시를 탄 한 버스기사의 이야기는 그래서 아이러니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이 버스기사는 “비정규직이니까 더 힘들다”며 “1년마다 재계약을 해야 한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여기에 대해서 유재석은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택시기사들의 고충을 다루면서도 버스기사의 고충 역시 놓치지 않았던 점은 그나마 이번 <무한도전>의 택시 아이템에서 어떤 균형감각을 잃지 않았던 면모였다.

 

결국 <무한도전>이 다루려던 것은 이번 택시법에 즈음하여 택시업계의 손을 들어주려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저 택시기사라는 직업을 통해 좀 더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을 것이고 그 속에 택시기사도 버스기사도 또 골목상권의 피해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무한도전>은 택시라는 접점을 통해 대중들과의 멋진 하루를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하필 민감한 시점에 이 아이템을 하게 된 것은 여러모로 프로그램 외적으로 호불호를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그것은 택시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이중적인 시선에서 비롯되는 일이다. 택시는 과연 대중교통인가 아닌가. 택시기사들의 삶이 힘겨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대중교통으로서 대중들이 인식할 만큼 서비스나 비용이 합당한 것인가. 이런 입장차는 결국 이번 택시를 아이템으로 삼은 <무한도전>에 대한 대중들의 갈라진 시선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정글의 법칙>, 조작 논란이 가져온 후폭풍

 

만일 조작 논란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정글의 법칙> 뉴질랜드편은 훨씬 더 흥미로웠을 지도 모른다. 뉴질랜드라는 무수한 판타지 영화에 등장했던 공간이 주는 막연한 동경이 있었을 것이고, 그 안에서 마치 대본 없이 찍은 한 편의 영화처럼 병만족의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원시 체험이 강렬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전사의 후예, 마오리족이 주는 강인한 인상이 뉴질랜드라는 나라에 대한 이국적인 정서를 만들어냈을 것이고, 그들에게 배우는 생존기술 또한 좀 더 팽팽한 긴장감을 동반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무 것도 없이 석기시대로 돌아간 초심의 이야기는 거꾸로 그 자체가 우리가 문명의 빛에 가려, 잊고 있었던 풍족한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 일으켰을 게다.

 

하지만 조작 논란의 여파는 컸다. <정글의 법칙>은 굳이 공개하지 않아도 될 제작과정을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장소 헌팅을 하는 과정에서 최대한 야생에 가까운 공간을 찾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른바 ‘여행지 논란’을 사전에 차단할 수밖에 없었고, 마오리족에 대한 현대사를 미리 알려줌으로써(사실 이건 이미 누구나 아는 일일 것이지만 그래도 굳이) 원주민 섭외에 대해 생길 수 있는 논란을 미리 막을 수밖에 없었을 게다.

 

당연한 일이다. 조작 논란이 생겼으니 그만큼 예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제작과정을 낱낱이 드러내는 편집은 그 자체로 방송의 재미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마치 영화를 보는데 영화 제작과정이 중간 중간 삽입되어 그 장면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기왕에 논란이 생긴 상황에서 <정글의 법칙> 제작진이 어쩔 수없이 취할 수밖에 없는 편집이지만 이것은 어찌 보면 이 프로그램의 재미 또한 상당부분 희생될 수 있는 편집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정글의 법칙> 뉴질랜드 편에서 다행스러운 것은 이러한 논란이 벌어지기 전이었지만 병만족이 스스로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석기 체험을 선택했다는 점일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원시상태로 돌아가 생존하는 모습을 굳이 보여주겠다고 한 것은 이들의 방송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생스러워도 석기로 살아남는 체험을 보여주겠다는 것.

 

중요한 것은 이것을 대중들이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다. 만일 이 체험을 ‘리얼리티’의 측면만을 주목해서 바라보게 되면 실제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자꾸만 의심과 조작의 눈초리로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조작 논란이 불거지면서 대중들에게 생겨난 선입견에서 비롯된다. 이런 선입견으로 바라보면 이 체험은 생고생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흥미를 주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왜 굳이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며칠 동안의 석기체험을 하는가 하는데 대한 이유와 의미를 생각한다면 조금 다른 관전 포인트의 재미를 얻을 수도 있다. 결국 그 원시체험을 대리경험하면서 우리가 사는 문명이 주는 편리함이 새삼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문명 이전의 우리네 인류를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 자연(마오리족은 땅을 모든 걸 나게 하는 여자 즉 어머니로 보았다)에 대한 고마움을 생각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정글의 법칙>은 이제 그 재미와 의미가 달라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모든 방송 리얼리티 논란이 다 그렇지만, 이것은 일종의 약속이 파괴된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TV는 결국 ‘진짜 일거야(리얼이 아닌 리얼리티)’라고 시청자와 제작자 사이에 암묵적인 약속을 하는 것으로 그 재미를 줄 수 있는 매체가 아닌가. 물론 의도적인 조작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방송 그 자체를 완벽한 리얼이라 생각하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마치 동화의 한 장면처럼 <정글의 법칙>은 그 리얼리티를 믿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하지만 드라마든 영화든 혹은 다큐멘터리든 예능이든 그 재미는 바로 이 ‘리얼리티에 대한 암묵적인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일 게다. 이미 방송은 촬영되었고 그 촬영분량은 아무래도 조작 논란의 영향 하에서 상당 부분 이야기의 재미를 포기한 채 편집되어 방영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건 이제 시청자들의 몫이 되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