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공감의 시대, 21세기식 소통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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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 21세기식 소통법

D.H.Jung 2011. 4. 11.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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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한 세기 전에 있었던 충격적인 사실. 당시 서구 사회에서는 전염병의 공포가 만연되어 있었다. 그래서일 게다. '위생'을 이유로 당시 사회에는 엄마와 아기의 신체적 접촉이 권유되지 않았다. 면역력이 부족한 아기가 감염되어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흔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의사가 버려진 아기들을 보호해주는 병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기들이 아무 이유 없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염병에 노출된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 원인은 어처구니없게도 아기의 '의욕상실' 때문이었다. 이 병원 역시 간호사들조차 아기와의 접촉이 거의 없었다고 하는데 이처럼 아기가 어떤 대상과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자 '삶의 의욕'을 잃었다는 얘기다. 그 후로 아기와의 접촉을 다시 허용하자 아기들은 몰라보게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에서 우리는 늘 상투어로 사용하고 있는 단어 하나를 재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소통'과 '공감'이다. 아기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누군가와 공감하고 교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성이 깨기도 전에 아기가 보이는 이 공감에 대한 욕망은 본능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감하지 못하면 심지어 죽음을 선택하기도 하니까. 그러니 호모 엠파티쿠스, 즉 '공감하는 인간'이란 말이 성립된다. 공감한다, 고로 존재한다.

사실 '공감'이 이 시대의 키워드가 된 것은 미디어에 의한 커뮤니케이션 혁명 덕분이다. 이제 인터넷이라는 전 세계 어느 곳이든 뻗어나갈 수 있는 네트워크는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된 지 오래다. 지금은 한 차원 더 나아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네트워크가 전 세계와 접촉하는 시대다. 스마트폰은 그 접점이고,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세상과 연결해주는 마법의 램프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와 감정을 토로하고, 어떤 이들은 거기에 맞장구를 쳐주고 공감해준다. 몇년 전만 해도 못 보던 풍경이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이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산업 자체를 바꾸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스마트폰에 이어 스마트TV 같은 스마트 가전기기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고, 이것은 스마트 워크처럼 기기에서 머물지 않고 생활 패턴의 변화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이 효율성이 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의 시대에서 우리가 겪었던 것은 분류하는 삶이었다. 컨베이어 벨트로 상징되는 전문화, 분업화는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삶을 분류 속에 밀어 넣었다. 우리에게 이른바 산업화의 시대였던 7,80년대는 바로 이 분류의 삶이 극단화되었던 시점이다. 우리는 나와 남, 동과 서, 성별과 나이, 학력, 계층, 문과와 이과, 남과 북, 심지어는 프로야구를 봐도 지역 연고를 분리하면서 살아왔다. 그 분류의 삶은 빠른 경제 성장이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가져왔지만 결국 빈부의 극단적 분류라는 사회적 희생을 동반했다. 나와 남은 늘 경쟁관계였다. 우리는 공통점을 찾기보다는 차이점을 찾는데 익숙해졌다. 사실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는 환경 재앙은 나와 남을 분리하는 시각에서 비롯된다. 아프리카는 환경 문제에 있어서 거의 원인 제공을 하지 않는 나라지만, 유럽이나 미대륙이 아무렇지 않게 뿜어대는 온실가스에 의해 처참하게 도륙되고 있다. 만일 아프리카를 남이 아니라 바로 나로 본다면 과연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공감의 시대는 바로 이런 위기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분류하는 삶이 전 지구를 위협하는 어떤 비등점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바보스럽게도 그 때서야 공존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공감은 따라서 차이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공통점을 찾는 삶이다. 우리는 성별, 나이, 피부색 등등이 다르지만 모두 인간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공감의 시대는 열린다.

'공감의 시대'라고 하면 어딘가 전 지구적인 거창한 거대담론을 떠올린다. 물론 공감은 거창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일상과 유리된 것은 아니다. 흔히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나 완전 공감했어"라고 말할 때 그 공감은 일상적이고 소소한 것이다. 하지만 이 일상적이고 소소한 공감이 커뮤니케이션 혁명과 만날 때, 거창한 거대담론이 되기도 한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타고 일찌감치 세계 구석구석으로 날아간 소녀시대나 카라의 인기는 소소하게 시작됐지만, 제2의 한류라는 거대한 결과로 이어졌다. 이집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의 물결은 누군가 SNS에 올린 작은 공감어린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 전 세계는 이집트의 이 변화를 주목하고 있다.

굳이 그렇게 멀리 가지 않더라도 공감이 바꿔놓은 세상은 우리 눈앞에 늘 펼쳐져 있다. 과거 연예인들은 자신과 일반 대중들을 분류하려고 했고, 자신들이 대중들과는 다른 '신비적 존재'임을 어필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TV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은 백이면 백, 자신들이 대중들과 똑같다는 것을 알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나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통해 공감하려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연예인과 일반인 사이에 점점 공통점이 부각되면서, 일반인들도 누구나 TV에 나올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작년 '슈퍼스타K2'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대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공감이 바꿔놓은 인식의 대전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감이 바꿔놓은 풍경 중 두드러지는 또 한 가지는 전문가들의 시대가 점점 저물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란 특정 분야에 정통한 사람을 일컫는데 이 특정 분야라는 것이 과거 분류의 시대의 산물이다. 그 시대에 우리는 경제 전문가를 나누고, 시사 전문가를 나누고, 심지어 영화 평론가와 문학가를 나누어 그런 분야는 그들 전문인들의 영역이라 치부하며 살아왔다. 따라서 그 전문가들의 말 한 마디는 당시에는 권력이었다. 하지만 공감의 시점으로 바뀌면서 전문가보다 더 전문가다운 호모 엠파티쿠스들이 등장했다. 블로거나 네티즌들은 자신들이 공감하는 것들에 대해 스스로 글을 생산하기도 하고, 타인의 글에 공감의 댓글을 달기도 한다. 블로거들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통섭의 시각을 갖는다. 엄마의 입장에서 보는 경제라든가, 직장인의 입장에서 보는 정치나 시사문제 등은 그 자체로 분류가 아닌 통합의 시각을 갖게 마련이다. 그래서 요즘은 전문가들의 멋진 미사여구보다 더 효과적인 게 아줌마들의 수다스럽지만 실제 생활에서 나오는 입소문이 되었다. 보통 사람과는 특별히 다르다고 대접받는 전문가(연예인도 마찬가지다)의 시대는 점점 저물고 있고 대신 우리와 똑같이 공감하며 함께 느끼기를 원하는 호모 엠파티쿠스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제 갓 사회에 발을 내딛고 있는 새내기들이라면 응당 이 변화의 흐름을 직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달라진 시대에 달라진 커뮤니케이션이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지도 알 것이다. 공감하고 공감하라. 누군가와 차이를 찾으려기보다는 함께 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아내고 소통하라.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우리는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어쩌면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위기 상황의 해법을 보여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