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로’는 사회적인 멜로

멜로 영화가 달라졌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에서 시작된 멜로의 변신은 김대승 감독의 ‘가을로’로 이어지면서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멜로 드라마’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가고 있다.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와 자살시도를 해온 여교수의 사랑을 그린 ‘우행시’. 이 멜로드라마는 그 기저에 ‘사형제도’폐지 논란의 불씨를 심어두었다. ‘가을로’ 역시 마찬가지. 이 영화는 잃어버린 사랑과 상처, 그 치유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이라는 사회적 메시지를 끌어안았다. 이 사회극과 멜로의 중간쯤에 위치한 영화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멜로 드라마라는 전통적인 장치에다 사회적 공감까지 얻어내려는 시도일까. 혹은 사회극의 무거움을 멜로 드라마의 감상으로 중화시키려는 의도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 개인적 차원의 멜로가 사회적 코드 안에서 읽히는 확장된 멜로의 결과일까.

멜로+사회적 공감, 두 마리 토끼 잡기
‘우행시’의 절묘함은 그것이 사회적 코드를 끝까지 쥐고 가면서 동시에 신파라는 전통적 코드 또한 버리지 않았다는 데 있다. 관객들은 눈물을 흘리는데 그것이 사회적 공감 때문인지, 신파 때문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즉 ‘우행시’에서 흐르는 눈물에는 여러 층위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멜로와 사회극은 웬만해서는 한 몸이 되기가 어렵다. 멜로로 흐르다보면 자칫 감정 과잉이 되기 쉽고, 사회극으로 흐르다보면 너무 이성적으로 되기 쉽기 때문이다. 두 마리 토끼 잡기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우행시’는 보기 좋게 그 성공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사실 그 눈물이 관습적 장면이 만들어낸 신파로 강요된 것이라 하더라도, 영화가 제시한 사회적 공감의 틀 안에서 용서해주었다.

‘우행시’가 멜로와 사회극 사이에서 멜로 쪽에 더 무게중심을 두었다면 ‘가을로’는 사회극쪽에 더 무게를 준다. 대부분의 영화평이나 영화 소개는 이 영화가 이번 가을의 대표적 멜로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멜로와는 다르다.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고 그들이 사랑하고 헤어지고 그 아픔과 상처를 이겨내는 그것은 멜로로 읽히지만 영화의 전체를 장악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느 날 갑자기 그들 앞에 벌어진 재난이다. 만일 이 재난이 천재지변이나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운명(예를 들면 불치병 같은)이었다면 이 영화는 온전히 멜로의 틀을 가져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천재가 아니고 인재인 데다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이다.

한 인간의 죽음을 대하면서 겪을 수 있는 반응으로 정신분석학에서는 애도, 분노, 죄의식, 공포와 불안, 피해의식 등을 꼽는데, 살아남은 최현우(유지태 분)는 분노의 반응을, 윤세진(엄지원 분)은 공포의 반응을 보인다. 정상적인 멜로의 상황이라면 죽음을 겪은 주인공은 이러한 반응들을 거처 결국에는 긍정의 상태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상황에 그들은 여전히 분노와 공포 속에 놓여있다.

본래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분노
감독이 영화 시사회에서 ‘분노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밝혔듯이 이 영화는 분노, 즉 하루아침에 수많은 삶을 앗아가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정부와 사회를 통틀어 벌어지는 총체적인 불감증에 대한 분노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분노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다큐멘터리나 시사고발 프로그램이지 영화가 할 일은 아니다. 김대승 감독은 이 사회적인 부조리와 거기서 발생하는 분노 끝에 멜로를 붙여 작품으로 만들어낸다. 이렇게 되자 멜로와 사회극의 경계가 절묘하게 무너져 내린다. 영화는 최현우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그가 서민주(김지수 분)를 잃었던 그 상처의 치유과정을 보여주지만, 그 과정을 통해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깊은 심연 속에 묻어두었던 분노를 끄집어내고, 그 분노를 다시 삭이며 치유하게 된다(그것이 미완의 치유일지라도).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멜로
영화 ‘가을로’는 개인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멜로의 일반적인 틀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시킨 영화이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사회적 멜로’라고나 할까. 이 사회적 멜로는 저 ‘우행시’에서 먼저 선을 보인 바 있고, ‘가을로’에서 더 깊어졌다. ‘우행시’가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하는데 있어서 멜로의 코드를 과용해 무언가 화장기가 가득했다면, ‘가을로’는 화장기 없앤 보다 다큐적인 접근을 한 본격 사회적 멜로가 될 것이다. 이 이른바 사회적 멜로가 갖는 힘은 바로 연애감정에서 오는 감정적 발로의 차원에 머물던 개인적 멜로에서, ‘사회적 공감’의 차원으로 보다 확장된 멜로를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의 위험성도 존재한다. 그것은 멜로가 가진 어쩔 수 없는 한계인 감정적 해결의 문제이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까지는 긍정적 역할을 해내지만, 그것의 해결에 있어서 너무나 미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을, ‘가을로’라는 영화의 시도가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네 사회가 오래도록 빠져있어 도저히 깨어날 것 같지 않은 사회적 불감증을 다시 환기시켜주는데 어쨌든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을로’는 마치 너무나 끔찍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멜로라는 틀을 빌려 부드럽게 끄집어내고 있다. 만일 영화를 보면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는 장면에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동안 스스로 묻어버린 분노의 한 조각을 찾아냈다는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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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통해 보는 우리시대 아파트의 실체

최근 삼풍백화점 붕괴를 소재로 한 영화 ‘가을로’의 주연을 맡은 유지태씨의 ‘삼풍 발언’이 논란이 되었다. 그가 한 말의 골자는 “백화점이 무너진 자리에 고가 아파트가 들어섰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며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아픔이었을 텐데 어떻게 그 자리에 위령탑 하나 없을 수 있나”, 그것이 “한탄스럽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 같은 소재의 영화 주연을 맡은 연기자로서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는 이야기. 하지만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게 꼭 자신들을 비난하는 이야기로 들렸던 모양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같은 유지태씨의 발언에 대해 일부 네티즌들이 보인 반응이다. 그 중 “그 비싼 땅을 왜 놀리냐”는 댓글에는 유지태씨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을 넘어 분노를 일으킨다. 유지태씨는 “자기도 할말은 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별 것 아닌 이야기로 끝날 수 있었던 유지태씨의 발언이 일으킨 일련의 파장은 좀 비상식적인 측면이 강하다. 유지태씨의 담담한 발언에 대한 반응들이 어딘가 오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혹시 유지태씨와 네티즌, 혹은 아파트 거주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 저 밑바닥에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괴물의 존재가 있는 건 아닐까.

아파트라는 괴물의 힘
그 괴물의 이름은 아파트다. 이명박 전 시장이 28살의 나이에 이사가 되어 앞날을 보고 뛰어들었다는 그 아파트. 평당 몇 천만 원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가치로 팔려나가는 아파트. 그럼에도 분양하는 날이면 며칠 전부터 밤잠 안자고 줄을 서는 아파트. 분양권 당첨이 마치 로또 복권 당첨이라도 되는 듯 사람들을 그 욕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아파트.

바로 몇 달 전에도 비슷한 사건들이 있었다. 강풀의 만화를 영화화한 ‘아파트’가 그 촬영장소로 사용됐던 아파트 주민들로부터 항의를 받았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재개발 지역의 플래카드가 토지공사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각각 상영금지가처분신청을 받았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영화가 현실의 한 부분을 건드리면서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하며 그 중심에는 모두 아파트라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도대체 이 아파트에 어떤 유령이 깃들었길래 이런 논란을 만들었던 것일까.

아파트 아래 묻혀진 피의 기억
영화 평론가 정성일씨는 영화 ‘짝패’와 ‘비열한 거리’ 그리고 ‘아파트’를 분석하는 글(폭력 공포 영화 속에 감춰진 ‘부동산’ 담론)에서 폭력, 공포 영화 속에 부동산 담론이 숨어 있다고 말했다. ‘짝패’와 ‘비열한 거리’에 등장하는 폭력과, ‘아파트’에서의 공포 그 밑바닥에는 아파트라는 욕망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들은 물론 아파트라는 사회적인 괴물에 대한 분석이나 비판을 담은 영화는 아니지만 거의 동시대에 그 배경으로서 아파트가 등장했다는 것은(그것도 폭력과 공포의 대상으로서), 여러모로 의미를 되새겨볼 만한 문제가 된다.

여기서 폭력과 공포를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다면 ‘피의 기억’이 될 것이다. 아파트는 ‘피의 기억’을 갖고 있다. 아파트가 세워지기 위해 누군가는 그 동네를 떠나야했거나 쫓겨나야 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주거의 생존을 두고 피를 흘렸던 것이다. 여기서 조폭은 부동산에 대한 환상을 갖고 부동산을 소유하려 하지만 결국 소유하지 못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짝패’의 필호(이범수 분)는 부동산을 위해 자신의 친구를 죽이고, 와 ‘비열한 거리’의 병두(조인성 분)는 철거로 쫓겨날 처지에 있는 자신이 타지역의 재개발에 앞장선다. 그들은 결국 그렇게 소원하던 아파트 한 채 얻지 못하고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죽음으로 이 부동산 사업이 끝나지 않는다는 예고다. 그들은 희생되지만 그 뒤에 있는 진짜 부동산 대부들은 살아남는다(짝패의 조사장과 비열한 거리의 황회장). 그러면 그들은 그 후에 어떻게 했을까. 새로운 제2, 제3의 필호와 병두를 기용해 이 돈 되는 아파트 사업을 하지 않았을까.

살아남은 것은 아파트뿐
부동산의 측면에서 볼 때, ‘짝패’와 ‘비열한 거리’가 아파트가 세워지기 전까지의 상황을 그렸다면 ‘아파트’는 그런 피를 기반으로 세워진 아파트에 입주한 사람들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아파트의 이미지는 그것이 돈이라는 자본주의의 신분증과 결탁해서 생긴 것이다. 우리가 아파트를 갖는 순간, 그 아파트는 입주자의 신분증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아파트라는 욕망과 그 안의 주인이 되어야할 입주자의 관계는 역전된다. 우리가 그 아파트에 사는 게 아니고, 어디에 있는 몇 평, 시가 몇 억 원짜리의 아파트에 우리가 사는 것이다. 우리가 아파트를 소유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아파트에 종속된다. 아파트를 얻고 길게는 30년 동안 그 아파트의 원금과 이자를 내기 위해 뼈빠지게 일을 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 멀쩡해 보이는 아파트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어떨까. 공포라는 장르는 늘 억압된 욕망의 분출을 목적으로 탄생한다. 누군가 그 아파트에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 그 욕망의 분출을 정당화한다. 아파트가 가진 이 두 얼굴(화려한 욕망과 이면의 추악함)에 관객들은 동화되면서 공포로서 자신 속에 있는 이율배반적인 욕망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결국 세진(고소영 분)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 세 편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죽었다. 하지만 여전히 살아남은 게 있다. 바로 아파트라는 괴물이다.

우리는 왜 분노하지 않을까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그 상징하는 바가 크다. 강남의 중심가에 있는 백화점, 모든 이들의 욕망이 모이는 그 곳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연일 TV에 순식간에 생매장된 사람들의 아비규환을 비추었지만 거기에 대한 어떤 비판이나 비평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놀랄 일도 아닌 것이 삼풍이 무너진 것은 성수대교가 무너진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반복에 무덤덤해졌다고나 할까. 이것은 마치 우리가 아파트라는 괴물을 쳐다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처음에는 재개발 문제로 인해 죽은 여러 사람들에 주목하던 것이 차츰 피의 기억을 잊는 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는 여전히 아파트가 들어선다. 이러한 무덤덤함, 분노하지 않음이 가져온 결과는 실로 참담하다. 희생은 당연한 것이 되고 이제는 그것이 새로 세워질 건물에 대한 기대감쪽으로 채워진다.

유지태씨와 아파트 거주자, 그리고 네티즌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말들은 그들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징후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아파트에 민감한가를 에둘러 말해준다. 우리는 모두 아파트를 소유하려 하지만 그 기저에 있는 것은 이 괴물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곳에 입성하지 못하면 저 주류사회에 편입될 수 없다는 것. 자본주의의 신분증을 받을 수 없다는 것. 따라서 그 공포심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적극적인 아파트 공화국에의 참여다. 이것은 마치 공포정치가 대중들을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처럼도 읽힌다. 분노해야할 일에 분노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어떤 폭력의 시스템에 침묵하는 꼴이 된다. 침묵은 적극적인 참여의 예고편이다. “분노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는 영화 ‘가을로’가 우리 가슴속에 침묵하고 있던 피끓는 분노를 끄집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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