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의 패자 없는 경기가 말해주는 것

도전하는 그들에게 패자가 있을까. '무한도전'이 복싱 특집편에서 다룬 WBC 세계 챔피언 최현미 선수와 도전자 쓰바사 선수의 경기에 패자는 없었다. 세계 챔피언이지만 스폰서도 없고 심지어 다음 경기를 잡지 못해 챔피언 벨트를 내줘야 할 위기(6개월 안에 방어전을 치르지 않으면 반납한다고 한다)에 있는 최현미 선수. 그리고 역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밝은 모습으로 꿋꿋이 복싱을 하고 있는 쓰바사 선수. '무한도전'은 두 선수의 명승부를 보여주었지만 승패의 결과는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이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경기를 통해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최선의 경기를 다한 선수들은 이미 모두 승자였다.

이 패자 없는 경기를 보여준 '무한도전'은 승패에만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던 권투 경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전해주었다. 일본까지 날아간 정형돈과 정준하는 쓰바사 선수 역시 최현미 선수만큼 속 깊은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프로그램은 모두 힘겨운 상황에서 도전하고 있는 이 두 선수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게 조명했다. 경기 전 좋은 경기를 보여 달라는 격려의 말은 물론이고, 경기가 끝난 후에도 쓰바사 선수의 라커룸을 찾아가 앞으로도 계속 응원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권투 경기, 그것도 한일전이라면 무조건 우리가 이겨야만 된다고 입을 모았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무한도전'의 풍경. 경기가 끝나고 쓰바사 선수의 멍든 눈을 보며 정형돈이 울먹거리고, 길이 끝내 눈물을 흘린 것은 왜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권투라는 경기가 갖고 있는 그 처절함과 힘겨움을 가까이서 바라보고는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도 링 위에 올라가는 그들에게는 더더욱.

흔히들 권투를 삶과 비교하곤 한다. 우리는 늘 아침에 세상이라는 링에 올라가 한바탕 힘겨운 경기를 치르고 다시 링 아래로 내려오는 삶을 반복한다. 링이라는 사회가 던져놓은 무대 위에서 우리는 늘 승자 혹은 패자가 되지만, 사실 링 밖으로 내려오면 누구나 누군가의 남편, 아내이거나 누군가의 부모로서 승자나 패자는 있을 수 없다. '무한도전'이 패자 없는 경기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바로 이 링 바깥의 시선으로 링 위에 오르는 두 선수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봅슬레이 특집이나, 복싱 특집처럼 이제 '무한도전'은 사회적인 관심이 미치지 않는 곳에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 프로그램이 과거와는 조금 결을 달리하는 새로운 도전과제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무한도전'의 멤버들은 이제 초창기의 그 낮은 위치에 서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은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서 스스로를 성장시켜 이제는 정상의 위치에 서 있다. 이것은 '무한도전'의 도전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무한도전'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지는 이 위기를 넘어서게 해준다. 팀원들의 성장에서 이제는 타인의 성장으로 '무한도전'이 도전하는 과제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무한도전'의 기치는, 승패가 아닌 그 최선을 다하는 것에 대한 도전의 가치를 보여줌으로써 공감을 자아냈다. 이제 '무한도전'은 그 최선을 다하는 자들을 찾아가 어깨를 두드려주고 있다. 그곳에 승자나 패자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사회를 흔히들 승자들이 모든 것을 다 차지하는 이른바 '승자독식사회'라고 한다. '무한도전'이 감동을 주는 것은 이 승자독식사회에서 패자 없는 사회를 꿈꾸기 때문일 것이다. '무한도전'에 패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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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버지들은 즐거우면 안될까

왜 이 땅에 사는 아버지들은 즐거우면 안되는 걸까. 이준익 감독의 ‘즐거운 인생’에는 인생이 즐겁지 못한 아버지들이 등장한다. 실직해 잘 나가는 교사 아내에 얹혀 살아가는 기영(정진영), 낮에는 택배, 밤에는 대리운전으로 자식 교육비 대기 바쁜 성욱(김윤석), 기러기 아빠로 한 대라도 더 중고차를 팔아 돈을 벌어야 하는 혁수(김상호)가 그들이다.

세대의 마이너리티, 가장
그래도 한 때 그들은 자신들이 조직했던 활화산이란 밴드 이름처럼 활활 타올랐던 적이 있다. 지금은 휴화산이 되어버린 그들. 그들이 ‘왕의 남자’, ‘라디오스타’를 통해 줄곧 마이너리티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던져주었던 이준익 감독이 ‘즐거운 인생’을 통해 보듬고자 하는 이들이다.

‘왕의 남자’에서 광대들을 왕과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리고, ‘라디오스타’에서 한물간 스타를 영월이란 변방으로 보내 다시 중심으로 치고 들어온 것처럼, ‘즐거운 인생’은 명퇴나 구조조정으로 고개 숙인 가장을 그 이전의 시간, 즉 젊음의 시간으로 돌려보내 한바탕 즐거운 난장을 벌인다. 즉 ‘왕의 남자’는 신분의 마이너리티를, ‘라디오스타’는 지역적인 마이너리티를 그리고 ‘즐거운 인생’은 말하자면 가장이라는 ‘세대의 마이너리티’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가 어떤 통쾌한 구석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마이너리티들이 중심을 치고 가는 이야기 얼개에 숨겨져 있다. 즉 이 소외된 이들이 본래의 모습을 통해 세상의 인정을 받는 순간, 그들을 소외되게 만들었던 현실의 제도나 왜곡 같은 것들이 깨지는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비천한 광대가 왕과 마주서서는 그보다 더 많은 자유를 가진 존재로 부각되고, 세월에 의해 밀려난 왕년의 스타가 영월이란 변방에서 그 주민들과 라디오를 통해 진심으로 소통하면서 그 진가를 보여주는 그런 이야기 구조 말이다.

가장들과 어깨동무 해주는 청춘들
‘즐거운 인생’은 그 연장선상에서 현실에 한없이 무너져 내리면서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들을 청춘의 꿈이었던 음악을 끌어들여 즐거운 인생으로 복권시킨다. 중요한 것은 이 마이너리티들의 위치상승이 욕망이 아닌 본 모습으로의 귀환을 뜻한다는 점이다. 즉 ‘즐거운 인생’은 특별할 것 없이 누구나 즐거워야 하는 인생을 즐겁지 못하게 살아가는 가장들에게 당신도 즐거울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영화다.

마이너리티를 넘어서는데 있어서 이준익 감독이 쓰는 또 하나의 방식은 당대의 동지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다. ‘왕의 남자’가 저 육갑(유해진), 칠득(정석용), 팔복(이승훈) 같은 광대를 끌어들였다면, ‘라디오스타’는 영월이란 변방의 주민들을 동지로 끌어들인다. 마찬가지로 ‘즐거운 인생’이 동참시키는 동지들은 대책 없는 청춘들이다. ‘라디오스타’에서 최곤(박중훈)을 따라다니는 노브레인을 통해 전조를 보였던, 음습한 지하클럽에서 미래가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음악이 있어 마냥 즐겁기 만한 청춘들은 ‘즐거운 인생’에서 이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있는 가장들과 기꺼이 어깨동무를 해준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음악이라는 소통의 창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아저씨는 믹 재거를 닮았어!”, “니가 믹 재거를 아니?”, “당근이지, 내가 롤링스톤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활화산 밴드를 따라다니는 젊은 여자애들과 늙다리 가장들이 술좌석에서 음악을 통해 소통되듯, 음악은 또한 현준(장근석)이란 조금은 까칠한 청춘과 이 가장들을 엮어놓는다. 억눌린 청춘들은 억압되어 자기의 즐거운 삶을 찾지 못하는 가장들과 동격으로 읽히면서 락이란 음악으로 공명한다. 이것은 락이 가진 저항성, 억압의 분출 같은 강력한 촉매제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버지들은 충분히 즐거울 자격이 있다
꺾어진 꿈들이 각각으로 있을 때는 자학적인 삶을 살아가다가, 하나둘 모이게 되자 “왜 우린 안되는데?”하는 현실에 대한 모반을 꿈꾸게 된다. 가족의 행복이라는 미명 하에 거추장스런 양복이나, ‘365일 6000원’이란 문구가 덕지덕지 써진 택배직원 제복을 걸쳐 입고 동분서주하는 자신의 삶이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찢어진 청바지와 티셔츠에 문신을 한 채 ‘즐거운 인생’을 찾아간다.

성욱의 처가 40대 중반에 밴드를 한다는 이 엄청난(?) 탈선에 대한 이유를 묻는다. 그러나 성욱의 답변은 단순하다. “하고 싶으니까.” 이 단순한 한 마디가 깊게 가슴을 후벼파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현실의 가장들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저 ‘브라보 마이라이프’에서 조민혁 부장(백윤식)이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데 한번쯤은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한번쯤은... 그러면 사치일까...”라고 말하듯, 이 시대의 마이너리티, 가장들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들의 어깨가 무언가를 걸머지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했었다면, 한없이 작아질 것을 요구하는 가장수난시대에 이제 가족들이 그 중압감을 덜어내고 어깨동무를 해줘야하지 않을까. 아버지들은 충분히 즐거울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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