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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담아냄으로서 삶이 예술이 된 다큐

 

"빨리 힘 내서 벌떡 일어나야지. 아들 손 잡고 뚜벅뚜벅 걸어가야지. 어메. 앵두나무 꽃이 이제 피려고 그래. 복숭아나무도 피려고 그러고, 매실도 피려고 그러고. 근데 어메는 왜 자꾸 이렇게 처져." 육십줄을 훌쩍 넘긴 아들이 자꾸만 기력이 없어지는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는 마치 아들의 잡은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기력없는 손가락을 재게도 움직인다.

 

 

'오백년의 약속(사진출처:EIDF)'

점점 없어지는 기력과 점점 사라지는 기억들. 노모의 시간들은 속절없이도 흘러간다. 마치 나이테처럼 세월의 더깨가 얹어져 깊어진 주름의 골만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 다큐가 전해주는 시간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아들은 노모의 가녀린 피부를 만지면서 "홍시처럼 얇아서 겁이 난다"고 말한다. 그 표현이 실감나게 아들이 노모의 손을 만지는 손은 조심스럽다.

 

'효'라고 얘기하면 어딘지 이 깊디 깊은 영화의 이야기를 너무 가볍게 해쳐버리는 느낌이다. 그것은 '효'의 본질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세태가 '효'라는 단어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쿨한 세대들에게 '효'를 얘기하면 어딘지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 시대다. 그러니 '효'보다는 한 사람의 삶과 그 삶이 흘러가는 시간과 흔적을 얘기하는 편이 낫겠다. <오백년의 약속>은 담담하게 이제 인생의 끝을 향해가는 노모에게 담겨진 시간들과 그 위로 겹쳐지는 아들의 시간을 그저 시간처럼 바람처럼 담아낸 기록물이다.

 

물론 노모를 마지막으로 보내며 아들이 오열하는 장면은 그 깊은 슬픔을 우리에게 온전히 전해준다. 하지만 그렇게 속절없이 세월에 깎여 사라지는 한 사람의 삶을 이 다큐가 기록해내고 있다는 점은 우리네 삶이 그렇게 허허롭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다큐 중간에 노모와 아들이 대청마루에 앉아 무언가 담소를 나누며 파안대소를 터뜨리는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끝은 결국 오지만 그 과정에 담겨진 아름다운 시간과 기억들은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아들에게도 또 관객에게도.

 

노모는 18살에 결혼해 남편과 사별하기까지 십여 년의 세월을 4미터 길이의 두루마리에 '여자소회가(18세기말부터 전해내려오는 내방가사)'로 풀어냈다고 한다. 아들은 이 어머니가 남긴 두루마리를 마치 소중한 추억이자 유산으로 아낀다. 이것은 아마도 한 사람의 때론 힘겨웠고 때론 즐거웠던 한 때가 남겨진 기록이자 유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 노모가 남긴 두루마리는 노모의 마지막을 담아낸 이 다큐와 유사한 의미를 남긴다. 삶은 지나가도 그것은 누군가에게 기록으로 남는다. 혹은 기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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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1)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자꾸 기력과 기억을 잃어가는 노모는 아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자 "애비야"하며 아들을 부른다. 그러자 아들이 다가가 "예 저 여기 있어요"라고 말한다. 기력이 없어 손 하나 까닥할 힘이 없어보이는 노모는 그러나 다가간 아들의 발등을 쓰다듬는다. 노모의 마음은 얼마나 아들이 고맙고 소중했을까.

 

사족2)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나오는 이준교 국장을 잘 안다. 10여년 전 필자가 모 잡지사에 있을 때 <월간 미술> 편집장을 하시다 나온 이준교 국장이 고정필자였다. 필자와 편집자였지만 우리의 관계는 그 이상이었다. 그 때의 모습 그대로인 국장님을 영화로 보게 된 것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늘 작품을 바라보시던 시선이 있으셨기 때문일까. 삶이 고스란히 담겨진 두루마리나 마지막이 담겨진 다큐영화가 노모의 삶을 예술로 만들고 있었다. 예술이란게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누군가의 삶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부디 보내신 마음 추스르스길.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osted by 더키앙

<전선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 인간

 

"팀은 대단히 놀라운 일을 해내는 능력이 있었죠. 그는 사진작가, 비디오작가, 저널리스트, 인도주의자, 참여자로서의 경계가 없는 그냥 팀이었어요. 그건..." 여기까지 말한 저널리스트 제임스 브라바존은 갑자기 말문이 막히는 듯 가만히 있더니 눈물을 훔쳐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무척 찾기 힘든 자질이죠."

 

 

'전선으로 가는 길(사진출처:EIDF)'

왜 제임스는 팀을 회고하면서 눈물을 흘렸을까. 팀 헤더링턴. 이 다큐멘터리의 감독이기도 한 세바스찬 융거와 함께 2008년 아프가니스탄 미군 기지를 촬영한 영화 <레스트레포>로 아카데미 다큐 부문 후보에 올랐던 인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최전선으로 들어가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 속에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던 인물. 그러다 폭발 사고로 사망한 인물.

 

제임스가 말한대로 그가 단지 저널리스트에 사진작가 비디오작가 인도주의자였다면 그가 남은 자들에게 전하는 진심이 이토록 크지는 못했을 게다. 그는 전쟁을 찍으려 전장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인간을 찍기 위해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많은 사진가들이 처참한 전쟁의 장면들을 찍을 때 그는 그 속에서도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사진을 통해 확인시켰다.

 

라이베리아 내전에 제임스와 함께 처음 최전선으로 들어간 팀이 확인한 것은 전쟁이 정의나 국가 간의 분쟁과는 상관없는 어떤 것이란 점이었다. 무수한 잔학행위가 벌어졌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일선 병사들과 지휘 계층 사이의 권력관계"라는 걸 팀은 꿰뚫어보았다. "전쟁은 젊은이들을 세뇌시키는 일환이고 결국 그들은 출신과 능력에 따라 정치 과정의 도구로 이용된다." 팀의 눈에는 그들의 고통이 먼저 보였던 것.

 

<레스트레포>를 찍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민군기지에서 함께 생활하며 그가 깨달은 것은 전쟁이 주는 끔찍함보다 더 큰 것이 피를 나눈 형제로 묶여지는 강렬한 유대감이었다. 즉 전쟁이 강렬한 것은 그 갈등이 만들어내는 파괴적인 속성보다 그 파괴적인 환경 속에서 온전히 하나로 똘똘 뭉쳐지는 그 놀라운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파괴의 현장에서 오히려 '교감'을 보았던 것. 참전용사였던 제임스의 할아버지는 "전쟁은 인류가 서로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유일한 기회"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최전선으로 간 팀이 통찰한 전쟁의 본질은 실로 놀랍다. "뉴스로 중계되는 이 세상에서 전쟁기계는 단순히 기술이나 폭탄, 미사일, 시스템이 아닙니다. 진정한 전쟁기계는 남자들을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 하나의 단체로 결속시키고 서로를 죽이게 만드는 것이죠. 결국 이렇게 산 중턱에 모여든 이 젊은이들은 살아 돌아가기 위해 서로를 보살피게 됩니다. 그게 다죠. 전쟁이나 정치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팀이 이렇게 총알이 날아다니는 최전선으로 들어가는 용기를 내고 또 깊은 통찰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남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속으로 들어가 동화됨으로써 그들의 실제 감정과 고통과 즐거움을 들여다봤다. 그 몰입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최전선에서도 거기서 싸우는 젊은이들과 똑같이 살아낼 수 있었던 것. 이것은 이 다큐가 전하는 또 다른 메시지이기도 하다. 삶이 그렇지 않은가. 살벌한 세상에서 우리를 살게 해주는 것은 그 진정한 몰입과 소통과 공감이 아니던가.

 

팀을 보내고 남게 된 세바스찬 융거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드디어 전쟁의 본질에 자신이 도달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을 누구와 싸우고 누구를 죽인다는 그런 갈등이 아니고 결국에는 형제를 잃게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형제를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 쓰는 것. <전선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그래서 전쟁이 아니라 인간이다.

 

"전쟁의 진정한 현실은 내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아니라 전쟁의 본질적 진실은 형제를 잃게된다는 확실성이라고 했어요. 이제 나도 형제를 잃었으니 모든 걸 깨달았을 거라더군요. 이건 냉담한 말이 아니에요. 진실은 냉담할 수 없죠. 진실이니까요. 마침내 알게됐습니다." - 세바스찬 융거

 

실로 이 다큐멘터리는 팀 헤더링턴이라는 인물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뭉클해지는 영화다. 그의 확신에 찬 입과 무언가를 꿰뚫어보는 듯한 두 눈 약간 흥분된 듯한 코는 그가 하는 수많은 말보다 더 많은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다큐가 가진 기록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팀의 얼굴만으로도 충분한.

Posted by 더키앙

다큐의 존재의미를 보여준 '나는 암살당할 것이다'

 

2013 EBS 국제 다큐영화제(EIDF)는 올해로 10회를 맞는 명실공히 다큐 최대의 축제. 그간 다큐가 가진 다양한 매력들을 매회 보여줌으로써 다큐의 재미는 물론이고 그 의미까지 확장시킨 것에 지대한 공헌을 한 영화제라 여겨진다. 특히 영화관 관람과 TV 시청이 모두 가능한 다큐영화제라는 점에서 TV다큐와 영화관 다큐 사이의 보이지 않는 장벽을 없애준 점은 다큐의 대중화를 위해 상당히 중요한 진일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교육방송으로서의 EBS가 다큐멘터리에 이처럼 깊은 애정과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향후 다큐가 가진 교육적인 효과를 에둘러 가늠하게 해준다.

 

 

'사진출처:나는 암살당할 것이다'

이번 EIDF 페스티벌 초이스에 선정된 11개 작품 중 하나인 저스틴 웹스터가 만든 <나는 암살당할 것이다>라는 작품은 이 영화제가 추구하고 있는 다큐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 다큐는 과테말라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살인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이야기 속에 살해된 당사자가 스스로 자신이 암살당할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9년 어느 날, 과테말라에서 로드리고 로젠버그라는 변호사가 이른 아침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살해당한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얼마 뒤, 그가 생전에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 내용의 동영상이 발견되고 유튜브를 통해 일파만파 퍼져나간다. 충격적인 것은 동영상 속의 로드리고가 살해 용의자로 당시 정적이었던 대통령을 지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과테말라 전체는 혼란에 휩싸이게 되고 그의 죽음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면서 감춰져 있던 내막이 조금씩 드러난다.

 

자신이 살해될 것을 알면서도 꿋꿋이 그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로드리고의 용기는 어찌 보면 과테말라라는 폭력이 난무하는 나라에 저항한 한 영웅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실제로도 다큐멘터리는 이 로드리고가 얼마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람인가를 주변 가족들과 동료들을 통해 증언해준다. 하지만 이야기는 단지 거기서 머무는 것은 아니다. 후반부에 가면 그의 인간적인 면모들이 등장하면서 이 사건이 국가의 폭력과 마주한 개인의 저항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복수심에 의해 생겨난 무모한 선택인지가 논쟁적인 문제로 제기된다.

 

 

'사진출처:나는 암살당할 것이다'

물론 그 선택에 대해서 다큐멘터리는 어떤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로드리고의 증언과 그 주변정황들을 촘촘히 보고난 후 우리들 각자가 생각해야 할 몫이다. 즉 이 다큐멘터리는 과테말라의 폭력과 정부의 부패에 대한 문제를 한 개인을 통해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한 사람의 드라마틱한 삶과 사랑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는 균형감각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자못 도발적인 소재의 다큐멘터리는 일방적인 주장에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네 사회와 우리의 삶에 대한 성찰로 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암살당할 것이다>가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영상이 가진 힘이다. 즉 첫 장면부터 등장하는 실제 살해된 로드리고의 증언은 다큐가 가진 핵심적인 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죽은 자의 증언이나 기록은 살아남은 자들에 어떤 의미를 남기는가. 사실 이것은 기록물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다큐멘터리가 가진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암살당할 것이다>라는 영화는 다큐에 대한 다큐라고도 볼 수 있겠다.

 

실로 모든 것들이 영상으로 기록되는 시대가 아닐 수 없다. 또 그 기록자들은 이제 특정 전문가들이 아니고 이제 누구나 스마트폰 하나씩을 들고 있는 우리 모두가 되고 있다. <나는 암살당할 것이다>의 많은 자료들이 CCTV나 음성파일 등 우리의 일상 속으로 들어온 영상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다큐의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걸 에둘러 말해준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로드리고처럼 기록을 남기고 싶어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절실한 그 의지가 있다면 누구나 자신의 메시지를 통해 사회에 논점을 던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다큐의 진수가 아닐까.

 

 

'사진출처:나는 암살당할 것이다'

10월 18일부터 25일까지 열리는 제 10회 국제다큐영화제는 고려대학교 KU시네마트랩, 건국대학교 KU 시네마테크, 인디 스페이스, EBS SPACE 등에서 관람할 수 있고 부대행사로 비틀즈의 비서이자 비틀즈 팬클럽의 관리자였던 프레다 켈리와 <Good Ol’ Freda>의 프로듀서인 제시카 로우슨이 참석한 자리에 그녀의 다큐 <Good Ol’ Freda>를 특별상영하는 <비틀스 데이(10월24일 목 오후 4시반)>가 있을 예정이다. 행사에는 우리나라의 비틀즈 트리뷰트 밴드인 멘틀즈와 타틀즈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또한 다큐 영화들은 EBS를 통해서도 방영될 예정이다. <나는 암살당할 것이다>는 10월20일(일) 밤 10시45분에 방영된다. 다큐의 진수를 느끼고 싶은 분께 강추하는 바이다.

 

* 이 다큐멘터리의 감독인 저스틴 웹스터는 유럽의 영화제작자이다. 현재는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며 남미에서 광범위하게 일하 고 있다. 그는 십년 넘게 국제 관객들을 대상으로 장편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왔고 상을 받는 등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EIDF 웹사이트(www.eidf.org)에서 총 10개 작품을 자유 관람할 수 있는 <페스티벌 패스>를 1만원에 구입 할 수 있다.)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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