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애국영화보다는 <변호인>에 가까운 까닭

 

요즘은 영화관에서 박수를 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만 70년대 말 80년대 초반만 해도 영화를 보며 박수치는 일이 흔했다. 이렇게 된 것은 과거에는 영화가 연극이나 비슷한 실제 무대 체험으로 받아들여졌던 반면, 이제는 영화가 그저 하나의 가상체험일 뿐이라고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량>을 보다보면 저도 모르게 이 시간을 거슬러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충동을 순간순간 느끼게 된다.

 

사진출처:영화 <명량>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는 법이지.” 이순신이 아들에게 던져주는 이 한 마디는 이 영화의 굵직한 메시지를 고스란히 담는다. 자신은 압송되어 고문까지 당하고 백의종군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나라를 지키는 최 일선에 서 있는 이순신. 그 이유는 왕이 아니라 백성이라는 것. <변호인>국가는 국민입니다!”라는 한 마디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명량>은 후반부의 해전 장면이 압도적인 스펙타클을 보여주는 블록버스터지만 그렇다고 단지 전투의 재미만을 보여주는 영화는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다. 영화의 전반부가 다소 지루할 정도로 이순신 장군의 내면을 향해 있는 건 그 장수로서의 고민을 감성적으로 이해한 연후에야 바다에서의 전투가 더 깊은 감동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죽음을 향해 스스럼없이 나아가는 자에게서 느껴지는 숭고미는 <명량>이 이순신 장군을 재조명하면서 바라보려는 것이다. 점점 다가오는 330척에 달하는 왜군의 배와 대적해야 하는 고작 12척 남은 배. 한 대 남은 거북선까지 불타버리고 병사들도 두려움에 탈영하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단 하나 남은 희망의 불씨를 떠올린다. 그것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죽음을 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명량이라는 회오리 바다는 그래서 바로 이 죽음에 대한 완벽한 상징으로 다가온다. 죽은 자들의 외침처럼 들려오는 그 바다의 울음소리가 주는 두려움을 내려다보는 이순신의 모습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는 표현이 중의적이라는 걸 말해준다. 그것은 이순신을 포함한 조선 병사들의 마음 속을 회오리치며 헤집고 다니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일이면서, 저 울돌목 바다가 만들어내는 무서운 조류변화를 오히려 전투의 기폭제로 활용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명량>은 저 77년 반공시절의 <난중일기> 같은 다소 애국심에 호소하는 영화와는 여러모로 궤를 달리한다. 영화는 국가 같은 애국에 호소하기보다는 차라리 백성들을 위하는 애민에 더 호소한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장수가 백성들과의 의리를 위해 기꺼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다. 게다가 영화가 포착해내는 이순신의 내면은 그것만으로도 국적과 상관없는 위대한 인간승리의 휴먼드라마를 보여준다.

 

김한민 감독은 <최종병기 활>이 그랬던 것처럼 <명량>에서도 역사적 상황을 바탕으로 단순하지만 묵직한 대결이 주는 액션의 묘미를 선사하면서도, 동시에 그 속에서 활이나 바다가 주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액션 속에 인물들의 감정이나 정서를 잘 얹는 감독인 만큼 죽음의 바다를 향해 나가는 이순신의 내면이 압도적인 전투신과 절묘하게 어우러지게 만들었다.

 

최민식의 연기는 한 마디로 압권이다. 그 스스로는 이순신 장군의 내면을 100% 이해하지 못해 흉내만 냈다고 했지만 영화는 최민식이라는 배우가 있어 비로소 수백 년 전의 영웅을 부활시킬 수 있었다. 표정 하나 동작 하나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연기는 죽음 앞에서 오히려 담대하게 맞섬으로써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걸 몸소 보여준 이순신의 면면을 되살려놓았다.

 

만일 영화를 보면서 박수를 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명량 해전 당시 유일한 희망이었던 이순신 장군에 대한 백성들의 마음과 공감하는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정작 나라를 지켜야할 정치인들은 저 살길만을 찾을 때, 오롯이 백성들만을 생각하며 선선히 죽음을 불사하고 나가는 리더십에 대한 강렬한 대중의 욕망이 수백 년을 넘어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앞에는 아직도 저 명량의 회오리 바다가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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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눈빛으로 기억되는 영화, '포화 속으로'

'포화 속으로'의 전쟁 스펙터클은 한 편의 액션영화를 보는 것처럼 숨 가쁘고 정신없을 정도로 현란하며 심지어 때론 아름답게까지 느껴진다.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으면 그 화려한 영상의 박진감 속에 빠져들 정도다. 하지만 그 스펙터클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조금 답답해진다. 많은 이들이 영화 개봉 전부터 불거져 나왔던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했던 문제나, 특정 집단의 자본이 들어갔다는 이야기로 인해 이 영화가 반공영화일 거라는 우려를 하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이 영화는 반공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가 반공영화가 아닌 이유는 당연하다. 상업영화이기 때문이다. 70년대도 아니고 2010년도에 반공영화는 대중들이 공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품성이 없다. 그래서 주인공 장범(탑)이, 죽어가며 '오마이'를 외치는 어린 북한병사를 처음으로 확인사살하고는 '그들 역시 괴수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조금은 생뚱맞아 보인다. 반공을 주창하던 시기는 전후의 일이지, 전쟁이 막 벌어지던 당대의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장면은 상업영화로서 반공 냄새를 없애려는 안간힘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반공영화가 아니라는 것이 반전영화라는 얘기는 아니다. 초반부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몰아치는 전투장면과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다며 포항에 학도병을 놔두고 가버리는 강석대 대위(김승우). 그리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것 같은 인민군 776부대를 이끄는 박무랑(차승원). 이들은 어느 편이라기보다는 모두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 던져진 그저 싸워야 하고 이겨야 살아남는 비슷비슷한 존재들처럼 그려진다. 한바탕 전투의 소란 속에서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고 살아남은 장범의 넋 나간 얼굴과, 새로 온 학도병들을 장범의 손에 맡긴 채 떠나가며 강석대 대위가 "너희들은 군인인가 아닌가"를 묻는 초반부의 장면은 그래서 이 영화가 마치 반전영화인 것 같은 인상을 던져준다.

하지만 국군이 떠나가고 포항에 남은 학도병들은 이상하게도 이 덧없는 어른들의 전쟁 속에서 스스로를 자가발전시키며 조국을 위해 몸을 던진다. 영화 후반부에 장범이 "우리는 군인인가 아닌가"를 선창하듯 질문하고, 다른 학도병들이 "군인이다!"라고 선언하는 장면부터, 거의 초인처럼 총을 쏴대는 장범과 갑조(권상우) 앞뒤로 마치 게임처럼 우수수 쓰러져버리는 북한 병사들의 모습은 액션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논조는 이렇게 바뀐다. 왜 싸워야 하는지 모르지만, 조국이라는 명제 앞에서는 결국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전쟁은 비극적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

이 쉽게 드러나는 영화의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감성적으로 영화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장범을 연기하는 탑의 눈빛이다.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아도 그의 두려움과 순수함과 강인함, 그리고 슬픔이 교차하는 그 눈빛은 많은 걸 얘기해준다. 영화를 보다가 혹시 눈물이 났다면 그것은 영화가 꾸며놓은 화려한 영상 때문도 아니고, 조악하지만 꾸역꾸역 집어넣은 모성애적인 관점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 모든 상황을 체념하듯 받아들이고 있는 탑의 슬픈 눈빛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탑의 눈빛은 이 영화와 이 영화가 방영되는 2010년도의 우리네 청년들의 눈빛을 닮았다. 마치 왜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전쟁터로 나갔다가 죽음을 맞이한 학도병들처럼, 여전히 이런 국가의 메시지 속에 던져진 채 그 싸움으로 점철된 어른들의 세상에 여전히 편입되기를 강요받아야 하는 청년들의 슬픔. 그래서 영화 마지막에 뒤늦게 돌아온 강석대 대위가 장범을 안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장면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하다. 어른들의 전쟁 속에 무참히 동원된 학도병에 대한 미안함, 혹은 그래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어른들의 시각에 대한 미안함. 탑의 슬픈 눈빛이 아픈 여운을 남기는 건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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