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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생활의 단상

똥은 철학적이다

D.H.Jung 2005. 9. 15.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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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은 철학적이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참 지금 하는 일은 전혀 그렇질 못하다.

남양주 가는 길에 양병원이라고 있다.
예전에 의학잡지 편집장 할 때 이 병원 원장하고 잘 알고 있었는데,
이 양반, 이른바 똥박사다. 이름도 요상한 대장항문과.
우리들 사이에서는 대항이라고 줄여 말하는데, 사실 이런 과는 본래 없었다.
그저 일반외과에서 항문치료를 하고 있었는데, 이쪽 환자들이 많아지다 보니
대항을 전문으로 하는 종합병원 규모의 병원까지 생겼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항병원이 1위, 인천의 성도병원이 2위, 양병원은 3위를 넘보고 있다.

서설일 뿐이고...(하도 이쪽 관련 책을 보달 보니 서설도 '첫똥'으로 들린다.)

여하튼 이 똥박사가 책을 좀 쓰자며 기획을 좀 해달란다.
변비 관련 책 하나, 치질 관련 책 하나...
젠장, 내가 항문에 대해 아는 게 뭐 있나?
도서관에 며칠 째 앉아서 관련 서적들을 읽고 있다.
문제는 한 자리에서 매일 같이 다음과 같은 책들을 수북히 쌓아놓고 읽는 내 모양새다.

- 치질, 입원않고 통증없이 낫는다.
- 치질, 변비, 대장병 쉽게 고친다.
- 누구나 알기쉬운 치질, 변비 이야기

매일 이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은 나를 안다.
나는 거의 일년 가까이 이 도서관을 애용하고 있다.
그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앉아서 책을 읽다가, 밖으로 나가기만 해도 나를 보는 눈이 영 떨떠름하다.

일주일은 참 그랬다.
이주일이 되자, 이제 이건 좀 문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너무 항문을 무시하는 거 같은 기분 때문에, 심지어
화도 났다.
이 사람들아, 너도 있고 나도 있고 다 우리 똥누며 사는 사람들인데 너무 그러지 맙시다.
이가 고장나면 치과가는 거고, 속이 고장나면 내과가는 건데,
항문 고장나면 항문외과 가는 거 당연한 거 아닌가...

여기서 나는 중요한 철학적 질문을 잡아내게 되었다...!

로마에 갔을 때, 내가 놀랐던 것은 바로 거기 있는 하수도 시스템이었다.
그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하수도는 지금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는데,
그 하수도 건설이 가능했기 때문에 도시가 번성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수도가 없던 시절에는 질병으로 살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먹고 사는 문제에만 집착하다 보니 우리는 자기 똥 보는 걸 두려워하게 되었다.
옛날에는 못먹으면 똥구멍이 찢어진다고 했지만,
요즘은 잘 먹고 운동안하고 그래서 똥구멍이 찢어진다.
소비의 첨단 시대를 살아가면서 먹는 문제만큼 싸는 문제는 더 중요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애써 먹는 문제에만 신경을 쓴다.
갑자기 마광수 교수님도 막 생각난다.(배설의 문제는 정말 중요해)
배설을 제대로 못하면 몸에 온갖 병들이 득시글대게 된다.
이른바 똥독이 오르는 것이다.
몇 가지 격언이나 표어들이 다른 시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은 여기서는 아랫물이 맑아야 윗물이 맑다는 식으로,
잘 사십니까? 하는 의례적 인사는 잘 싸십니까?로,
잘 먹고 잘 사는 법이란 공전의 히트를 친 방송, 책은 있어도
왜 잘 싸고 잘 사는 법이란 그런 것들은 없는지 모든 게 아리송했다.

2주째 항문만 쳐다보고 있다.

그러다보니 보이기 시작한다. 변비걸린 사회와, 변비 부추기는 사회...
얘들아. 변에 변이 생기면, 이런 변이 없다.
누가 좀 속시원히 뚫어주는 사람 없나?

난 이제 도서관에서 날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 눈치 보지 않게 됐다.
하지만 이 일의 후유증은 분명히 있다.
며칠째 화장실을 못가고 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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